
'사도행전'에 해당되는 글 68건
- 2018.04.06
- 2018.04.03
- 2018.03.27
- 2018.03.14
- 2018.03.11
- 2018.02.22
- 2018.02.17
- 2018.02.07
열 두 사도/안드레(사도행전28:30-31)
안드레/!Andreva"/Andêas는 ‘남자다운’이란 뜻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 어부였습니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마4:18, 눅6:14, 요1:44). 안드레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요1:40).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고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1:41,42). 안드레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4:18,19). 안드레는 군중들 중에서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소개하였습니다(요6:8,9). 안드레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헬라인의 청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요12:20,23). 안드레는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마10:2, 막3:16).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강론하실 때, 성전의 멸망과 주의 재림이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인지를 물었던 네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막13:3,4). 안드레는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행11:12-14).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는 스구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증거했으며, 아가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X자로 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러한 모양의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 부르고 있습니다.
성실한 인도자였던 킴 볼((Edward Kimball)은 보스턴의 젊은 신발 판매인 무디(Dwight L. Moody)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설득하였을 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몰랐습니다. 안드레는 자기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의 탁월함 때문에 제2의 베드로가 되려는 어떠한 열망도 품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벳새다에 살았던 어부(요한복음1:44)인 안드레는 당시의 어부들만큼 거칠고 굳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베드로가 결혼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함께 잡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안드레에 관한 언급이 드물긴 하지만, 그가 주님과 특별히 친밀하였고,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의 동생이었던 걸로 믿어지는 안드레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에서처럼 그 형의 이름을 빌어 소개됩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 지 요한은 이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당시 죽고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벳새다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언급하는 자리에서 독특한 순서로 기록합니다(요1:44). 동생이 먼저 나오고, 그보다 연상이 더 훨씬 더 중요한 형이 나중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직분을 수행하기 전, 그러니까 사도들이 기름부음을 받고 또한 베드로가 그분을 뵙기 이전의 시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유일하게 안드레만 제자였습니다. 아직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는 시기에 이르면 베드로가 제자들 명단 중에서 맨 앞에 나오고 이어 그의 헌신적인 형제 안드레가 두 번째로 나옵니다. 안드레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우리도 존경해야 합니다.
안드레는 예수의 첫 번째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성경에서 맨 처음 안드레를 보게 되는 곳은 그가 살았던 갈릴리가 아닙니다. 요단 건너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3km지역입니다. 갈릴리에서 베다니는 약90km정도 떨어진 지역입니다. 세례요한은 거기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을 탐닉하던 유대인 안드레가 거기서 예수님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안드레는 요단강 계곡의 하류에서 일어난 새로운 운동의 소식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안드레는 광야의 엄한 설교자로부터 시몬과 빌립과 함께 그들에겐 친숙한 율법학자의 가르침과는 아주 딴판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회당의 가르침은 냉혹하고 형식적이며 생명감이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성격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그에게 들렸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사정없이 쳐서 외쳤습니다. 그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외식하는 자들과 위선자들에게 준열한 질타를 퍼부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이 곧 오시리라는 요한의 말에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는 젊은 안드레는 감화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는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만약 안드레가 하나님을 향한 열성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가 요한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안드레는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안드레는 항상 베드로의 그늘에 있었습니다. 서신서도 한권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회의 설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열성적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소박한 마음이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 두 사도/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0) | 2018.04.16 |
---|---|
열 두 사도/바돌로매 (0) | 2018.04.12 |
열 두 사도 (0) | 2018.04.03 |
복음의 세계화 (0) | 2018.03.27 |
유대는 거절하고 이방은 받아들이고 (0) | 2018.03.17 |
열 두 사도(사도행전28:30-31)
‘사도’/ajpovstolo"/apôstolos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ajpostevllw/apostêllo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도라는 말이 관용화(慣用化) 되어서 아무데나 ‘사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자신들이 ‘사도’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사도직’을 실제로 계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 틀린 말이며, 틀린 생각들이고,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의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직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한정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란 계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사상에 있어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에 있어서 상당한 분량이 그들에게 할애되고 있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지역에 그들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사도들에 관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지 못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사도들의 인척관계를 우리들이 훑어볼 때 다음과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요나 즉 요한의 아들들입니다(요1:42, 21:15).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이었습니다(마20:20, 27:56, 막15:40,16:1). 레위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막2:14). 작은 야고보도 역시 알패오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기 때문에 그와 마태는 형제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5과 마가복음15:40절을 보면 글로바(눅24:18절의 글로바가 아님)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의 모친이며, 따라서 글로바는 알패오로 추정합니다.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라, 다른 야고보의 아들입니다(눅6:16). 가룟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습니다(요6:71,13:26). 가룟이란 말은 유다에게 붙은 게 아니라 시몬에게 부속되었는데, 이는 아버지 시몬과 아들 유다가 유대의 가룟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거주 지역은 주로 갈릴리였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빌립은 벳세다에서 살았습니다(막1:16-24, 요1:44,12:21). 이들 넷은 나중에 가버나움에서 살았습니다(막1:21,29).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후에 에베소로 옮겼습니다(행3:1,15:6, 갈2:1,9). 마태는 벳세다에 속해 있었습니다(막 2:1,14). 나다나엘이라고도 하는 바돌로매는 갈릴리의 가나에서 살았습니다(요21:2). 도마, 작은 야고보, 유다 및 열심당원 시몬은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유대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직업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였습니다(막1:16,19). 마태는 세리였었습니다(마9:9). 다른 일곱 제자들의 직업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상호관계는 열 두 제자는 서로 관련되어 있었고, 갈릴리의 예수 그리스도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지간이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으며, 또한 작은 야고보와 마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도 아마 형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었는데, 빌립도 그의 형제를 그분에게 인도하였던 것 같습니다(요1:40-45). 만약 세베대의 아내였던 살로메가 동정녀 마리아의 누이였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사촌입니다(요19:25).
열 두 사도/바돌로매 (0) | 2018.04.12 |
---|---|
열 두 사도/안드레 (0) | 2018.04.06 |
복음의 세계화 (0) | 2018.03.27 |
유대는 거절하고 이방은 받아들이고 (0) | 2018.03.17 |
진실게임 (0) | 2018.03.14 |
복음의 세계화(사도행전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사도는 Roma에 도착하는 즉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두 해나 걸려서 재판을 받은 듯 합니다. 두 해란 Ramsay에 의하면 고소자들이 자기들의 고소를 진술해야 하는 법정기간인 18개월도 포함된 기간이라고 주석했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사도는 셋집에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다른 곳에 갈 수는 없었지만, 오는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몸이 감옥에 있었지만, 복음은 감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어떤 성도들은 심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오늘날의 curtain처럼 얇은 것이 아닙니다. 약30cm의 두께였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헤롯성전이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헤롯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에 1세기의 랍비들은 마지막 10년까지 유대교를 다시 조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랍비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예배에 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를 회당기도에 삽입시켰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유대인들과 Roma인들의 이중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도적 메시지는 점점 커가기만 했고, 확장되어가기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후 100년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小Asia, Syria, Macedonia, Greece, Roma 시에 등장했습니다. 마치 화살에 끈을 달아서 금을 그은 것 같았습니다. 지중해 동쪽해안의 작은 지역, 그것도 나사렛이라는 알아주지 않는 지역에서 시작된 종교는 전 세계를 급속도로 복음화시켰습니다. 1600년에 걸쳐서 유럽 온 대륙에 퍼진 복음은 곧 아메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불과 300년에 걸쳐서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19세기에 비로소 복음이 아시아에 전해졌습니다. 현재는 미국과 한국에서 복음을 전세계에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거침없이 진군했습니다. 복음은 마치 미사일처럼 날아서 가기도 했고, 저돌적인 탱크처럼 험지에도 거침없이 진군했습니다. 왜 이렇게 복음이 거침없이 진군했습니까?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멸망하지 말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필요 없으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재물 또한 필요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복음은 곧 영생의 길입니다.
열 두 사도/안드레 (0) | 2018.04.06 |
---|---|
열 두 사도 (0) | 2018.04.03 |
유대는 거절하고 이방은 받아들이고 (0) | 2018.03.17 |
진실게임 (0) | 2018.03.14 |
그리스도를 위한 감금 (0) | 2018.03.11 |
진실게임(사도행전28:17-22)
바울사도는 Roma에 도착하여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을 찾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Roma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대적자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보나마나 바울사도에 대한 편견에 빠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죄수로 된 이유를 사전에 그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습니다. 바울자신은 이스라엘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규모)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Roma인에게 자신을 내어주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Roma인들은 나를 심문한 결과 죄가 없으므로 놓으려 했는데, 유대인들이 극력 반대하여 마지못해 내가 황제의 재판을 받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바울에 대해서 좋지 못한 것을 말하든지 또는 이야기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훼방으로 봐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충분히 Roma시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상 진실을 왜곡 보도할 때 진실을 ‘호도’한다고 합니다. ‘호도’라는 말은 풀을 바른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사실을 얼버무려 넘김으로써 속이거나 감춘다는 말입니다. 역사에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진실이 가려졌습니다. 그리고 불의가 승리하고, 비리가 덮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파에 대해서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진실을 심하게 호도한 것입니다. Roma제국 내에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3:14,15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4: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결국 유대인들은 그 좋은 복음을 밖으로 차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구약에 가두기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복음은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마라톤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가 가두려고 해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종교도 아닙니다. 복음은 종교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반대하든지, 어떤 국가의 유력자가 반대하든지 간에 복음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진실게임은 복음이 합니다.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사이에 복음은 유대에서 turn을 했습니다. 유대를 간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자신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도 영원히 못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복음의 세계화 (0) | 2018.03.27 |
---|---|
유대는 거절하고 이방은 받아들이고 (0) | 2018.03.17 |
그리스도를 위한 감금 (0) | 2018.03.11 |
바울을 격려하시는 하나님 (0) | 2018.03.02 |
은혜를 갚게 하시는 하나님 (0) | 2018.02.26 |
그리스도를 위한 갇힘(사도행전28:17-22)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사도는 Roma에 들어가는 즉시 황제의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재판을 받기까지 한 군사와 함께 다른 죄수들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금된 장소는 주위에 웅대한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공화국의 말기에 세워졌습니다. 초기 황제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전면에는 Capitoline Hill이 있었습니다. Gauls가 침공하기 오래전부터 유명한 건물이었습니다. 정상에 Jupiter 신전이 있었습니다. 왼쪽 가까이에는 그 언덕을 덮고 있는 넓은 구역의 궁전이었습니다. ‘가이사의 집’에는 Gauls의 이름이 황실의 찬란함과 함께 현대의 온갖 유럽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전에는 궁궐에 소속된 근위대에 宿營(숙영)하는 황실부대가 있었습니다. 율리오는 그의 죄수들을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는 모든 피고들을 감금하는 것을 공식임무로 하고 있는 집정관 Burrus에게 넘겼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곳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속박은 custodia libera/자유로운 감금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상 이런 죄수는 그를 지키는 한 군사에게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감금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빌립보서1:17,13,17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7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에베소서3: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로새서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경비원의 끊임없는 교체는 그 군사들로 하여금 바울사도의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황실에서 복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Mega-church는 고난에서 제외됩니다. 이들은 고난을 받을 이유도 없고, 고난을 절대적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소형교회들은 엄청난 고난을 받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자율적 감금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을 성도들은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는 거절하고 이방은 받아들이고 (0) | 2018.03.17 |
---|---|
진실게임 (0) | 2018.03.14 |
바울을 격려하시는 하나님 (0) | 2018.03.02 |
은혜를 갚게 하시는 하나님 (0) | 2018.02.26 |
친절한 사람들 (0) | 2018.02.22 |
친절한 사람들(사도행전28:7-10)
멜리데에 상륙하여 대접을 받고 있는 중에 누가는 보블리오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돌립니다. 보블리오는 멜리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마침 바울일행이 상륙한 근처에 보블리오의 토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보블리오는 바울일행을(276명) 사흘간이나 친절하게 대접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친절한 보블리오입니다. 276명을 3일간이나 먹고 재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블리오는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Jan Hus/1374-1415는 교회개혁과 체코인의 민족주의의 대의를 위한 순교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Hus는 1401년 사제로 임명되었으며 프라하의 찰스 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대학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하면서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Hus는 wyclif/위클리프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교회내의 권위로서 성경을 강조하였습니다. Hus는 설교를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의 주저 교회론(On the Church)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정의하였습니다. Hus는 성직의 전통적 권위를 옹호하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Hus는 교황이나 추기경이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만들 수 없으며 또한 어떤 그리스도인도 명백히 잘못된 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Hus는 성직자의 부패를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이 彫像(조상)을 예배하고 거짓된 기적을 믿으며 “미신적 순례여행”을 비평하였습니다. Hus는 성찬식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허락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습니다.
당연히 Hus는 후스는 프라하에서 오랜 악전고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Roma에 회부되었습니다. 1415년 Hus는 그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의회(CounciI of Constance)에 참석했습니다. Hus는 황제의 안전 통행증을 가지고 여행하였지만 그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프라하의 대주교는 Hus의 입장을 강력하게 배격했습니다.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서와 Hus의 책들을 사제들의 Te Deum/‘하나님이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의 노래 속에서 들으면서 불에 태웠다. 그리고 그들은 Hus에게 교황의 명령들에 복종할 의사가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교황의 명령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할 경우에는 복종하겠지만 ‘모순될 경우에는’ 안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교황은 Hus를 파문시켰습니다.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가두고 Hus를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문은 일방적이었습니다. Hus가 말하려고 하면 마귀들의 조종을 받는 자들이 사방에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들은 Hus를 화형시켰습니다. 재를 모아서 흔적이 남지 않도록 기둥의 주변 땅속에 묻고, 나머지 재는 라인 강에 뿌렸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보헤미아의 총대들은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곧 후스주의자들(Hussites)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오자 종교적관용과 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들은 시의회의원들 가운데 마귀 같은 13명을 의회당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로써 15년이나 교황주의자들과 전쟁을 했습니다. 많은 후스주의자들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렸습니다. 후에는 보헤미아 형제단이라고 불렸다가 또는 모라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eren)이라 불렀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단들은 진젠도르프 시대에 교황주의자들에게 매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진젠도르프가 자기의 할머니로부터 구입한 작센(Sachse) 구역에서 피난처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들을 자신의 구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작센 구역에는 모두 3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정착하였습니다. 이곳은 모라비안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루터교도와 칼빈주의자들 그리고 후스파들도 거주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로 여기고 사랑하였으며 한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신학생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말을 합니다. 자신들도 신학교를 나왔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신학생들에게 자리를 주지 않습니다. 대형교회에서 신학생들이 들어갈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신학생들이 과잉생산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친절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못한다고 자신들의 안위만 걱정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야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욕심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격려하시는 하나님 (0) | 2018.03.02 |
---|---|
은혜를 갚게 하시는 하나님 (0) | 2018.02.26 |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 (0) | 2018.02.17 |
독사에 물려도 (0) | 2018.02.12 |
구원을 얻은 사람들 (0) | 2018.02.07 |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사도행전28:1-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6절)
고대 헬라세계에서 신개념은 본질적으로 다신론적입니다. 많은 개개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들의 질서정연한 전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신들에 대한 다수 개념에서부터 신들의 계보와 계급이 발전되었습니다. 높고 낮은 신들, 신들의 집안, 그리고 만신전이 그 예입니다. Zeus Apollo 등을 신이라고 하며, 우주도 신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Greco-Roman시대에는 원시적인 힘들에 대해서도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신 개념으로서 신들은 하나의 주어진 요인(factor)입니다. 신들은 비록 영원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게된 것들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혼돈과 투쟁하여 원시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힘들을 통제하여 다스리는 질서요 형태(그러므로 세상의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신 개념은 신들은 국가에서의 질서와 같은 인간적 질서와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신들은 우월한 능력과 지복을 누리지만 도덕적 진지성은 결여합니다. 신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감정과 관습도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유일하시고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역사 이래로 다양한 神觀念들을 형성시켜 왔습니다. 어릴 때에 무슨 신이 이 땅에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신이란 무엇일까? 무덤에 가서 절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에게 신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죽음의 저 너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야 정상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精靈信仰/animism / 인간의 육체를 떠난 亡靈들이 떠돌아다니며 인간생활에 좋고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영혼들을 달래거나 숭배하는 신앙입니다. 즉 Shamanism입니다. 샤머니즘은 샤먼에 의하여 주도되어 생겨나는 종교현상입니다. 샤먼(Shaman)이란 병자를 고치고 저 세상과 교통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한 것입니다. Shamanism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에서 두드러졌습니다.
2. 多神論/polytheism / 여러 신들의 존재를 신용하는 것으로 Greece 신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대개 여러 신들은 영웅들이나 자연의 대상들 즉 행성이나 호수, 산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들을 보면 신과 인간의 불륜들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따라서 신인가 하면 인간이고, 인간인가 하면 신인 것이 그리스 로마 신관입니다.
3. 汎神論/pantheism /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브라만교입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제l원인을 신으로 생각하며 신과 만유를 통일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모든 것이 신입니다. 개구리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나 소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과 태양 달도 신으로 착각합니다.
4. 理神論/deism / 17, 18세기에 주로 영국의 자유사상가나 과학자들에 의해 제창된 바 있는 합리주의적 유신론으로서 역사 속의 초자연적인 것들 일체를 배격하는 신사상입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서만 파악하며 내재하셔서 인간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강력히 부인합니다.
이상과 같이 사람들은 신도 아닌 것을 믿고 있습니다. 신이라고 하면 창조하고 거룩하며 인간들의 모든 것을 섭리하고 관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갚게 하시는 하나님 (0) | 2018.02.26 |
---|---|
친절한 사람들 (0) | 2018.02.22 |
독사에 물려도 (0) | 2018.02.12 |
구원을 얻은 사람들 (0) | 2018.02.07 |
좋은 사람들 (0) | 2018.01.29 |
구원을 얻은 사람들(사도행전28:1-6)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Melivth는 벌꿀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마도 벌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Mellîte는 무리지어 있는 메마른 작은 바위섬입니다. Mellîte는 한때 Carthago의 점령지였습니다. 바울일행은 섬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에서 구원은 diaswvzw/diasôzo 는 ‘안전하게 살려내다. 구원하다. 구출하다’입니다. diav/diâ/통하여 와 swvzw/sô캐/구원하다의 합성어로서 ‘무사히 옮기거나 구해내다’입니다.
diasôzo는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겪은 난파와 여러가지 다른 위험들을 피한 것에서 등장합니다(행23:24,27:43,44,28:1,4). 또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음을 입은 병자(마14:36), 자신의 종을 고쳐주기를 원한 백부장의 간구(눅7:3)에 diasôzo가 등장합니다. 베드로전서3:20에서는 노아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여덟 사람들(벧전3:20)에 관해 사용되었습니다. 육체적인 위험들에 관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구원론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합리한 일들을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불합리, 경제적인 불합리, 그 외에 여러 불합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하다면 이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선하다면 절대로 불합리한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4장2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후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이성적이고 불멸적인 영혼을 주셨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을 부여해 주셨다. 또한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해 주셨고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범죄 할 수 있는 가능성 아래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허락해 주셨는바 그 의지는 변화되기 쉬웠다. 그들은 마음에 새겨진 율법 외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 명령을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운데 행복하였으며 또한 피조물들을 다스렸다.
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4장1-3항을 보면
우리의 시조들은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를 잃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교통도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그들이 온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그들이 범한 이 같은 죄의 죄책은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 또한 그 죄로 인하여 바로 그 사망과 부패한 성품이 통상적인 출생법에 의하여 그 시조들에게서부터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소위 말해서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로 말미암아 생겨난 산물이 아닙니다. 아주 저등한 것으로부터 고등동물로 진화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법을 인간들이 따라야 합니다. 생물이 살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조건들이 맞아야 합니다. 온도 습도 등 여러 가지가 맞아야 합니다. 우주의 많은 별 중에서 그에 맞는 조건이 지구밖에는 없습니다. 지구 같은 별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쏟고 있지만 현재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지구의 위성인 달에 가서 살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겠습니까? 그러나 달은 지구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믿어야 합니다. 죄인임을 인식한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말을 믿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숨이 붙어 있을 동안에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곧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영혼을 절대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떠난 영혼들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안에 있습니다. 그 어떤 세력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배 안에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의 손에서 떠난 것입니다. 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있다고 하면 신성모독입니다.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죄에 놓여나야 합니다. 사람은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9)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오직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경건한 근심을 해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그러므로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오직 주의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