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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하는 아벨의 피(창세기4:8-10)
9절을 보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가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죄에 대한 인정과 회개를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3:9의 “네가 어디 있느냐”고 아담에게 물으시는 회개를촉구하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흉악한 죄인이라도 즉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에 대한 가인의 대답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입니다. 가인의 대답은 그가 자기 아우를 지키는 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아우 아벨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소하느니라”하셨습니다. '천둥처럼 소리나다'이다. 큰 고통에서 도움을 부르짖는다거나 몹시 흥분하여 절규를 발하는 것, 불의한 자들에 대한 피해자들이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벨의 핏 소리와 그리스도의 핏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부르짖는 무죄한 아벨의 핏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피해자가 너무 순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인간이 잔학하게 인간에게 행한 죄를 아신다는 진리입니다. 아벨의 핏소리는 복수를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가인에게 재앙을 내릴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피를 조사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살인자의 추방을 확고히 해 줄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피가 땅으로부터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 12:24)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갈보리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께 열납된 희생제사의 피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핏 소리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핏소리는 복수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의 외침은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대단히 실질적인 효과로 응답되었습니다. 역시 그리스도의 피의 외침도 하늘로부터 적절하고도 자비로운 효과를 야기시켰습니다. 땅은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서 덮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 피를 드러내 놓았습니다. 그 피는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외칩니다. 아벨의 피도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피도 외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크게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더 크게 외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괴로워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죄가 크든 작든 범죄자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50년을 도통했다고 하는 사람이나,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나, 교황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기독교전세계회장이라고 하더라도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죄에 대해서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적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도 죄를 용서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앞을 떠난 가인 (0) | 2012.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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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려야 할 죄 (0) | 2012.03.23 |
가인과 아벨의 제물 (0) | 2012.03.22 |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창 4:8; 요일3:12)
@yIq' !q;Y:w" hd<C;B' !t;/yh]Bi yhiy]w" wyji=a; lb,h, Ala, @yIq' rm,aYow"
.WhgEr]h'Y"w" wyjia; lb,h, Ala,
(그리고)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리고 (일어나) 그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가인이 아벨에게 고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인이 아벨에게 계속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가인이··· 아벨을 대하여 일어서서 그를 죽이니라’입니다. NIV성경은 “Let's go out to the field.”가 첨가되었고, RSV와 NRSV에 “Let us go out to the field” 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가인이 들로 나가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기 위해 돌을 들어 쳐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어떻게 아벨에게 가인이 말했는지는 모르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후 이들이 들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가인이 집안에서는 마음에 감추고 있었으나 들에 있을 때는 자기의 본마음을 표출하여 마귀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악의 증대와 살인의 동기입니다. 아담의 타락이 가져온 죄의 저주는 가장 무서운 살인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타락이 급속히 그들의 아이에게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의 단순한 불복종은 가인에게서 완전한 살인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금지구역의 과일을 손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범죄입니다. 작은 죄가 우리의 가정에 들어오면 그것을 방치하면 죄는 많아집니다. 너무 커져서 제어하거나 다스릴 수 없게 되어집니다. 우리의 작은 죄가 비극적인 사건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시기가 살인의 동기였습니다. 가인은 제사가 거부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제물의 거절로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를 화나게 한 것은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아우가 가졌다는 점입니다. 이기심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고 시기로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증오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이기심은 모든 종류의 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미입니다. 가인은 동생이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예배 행위가 최초의 살인의 원인이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가 모두 진리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세속종교입니다. 그것들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이 행사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입니다. 그들의 종교대학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각 처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그곳에 가면 지옥에 들어가는데 끌려갑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사람들을 방법만 다르게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종교를 주의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인자한 종교를, 겉으로는 굉장한 고등종교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죄인의 운명 (0) | 2012.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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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하는 아벨의 피 (0) | 2012.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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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제물 (0) | 2012.03.22 |
가인과 아벨의 출생 (0) | 2012.03.21 |
다스려야 할 죄(창세기4:6,7)
$be=ro taF;j' jt'P,l' byfiyte al !~aiw] 7절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그) 죄가 (네) 문에 엎드린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선(테티브)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하타아)가 (네)문에 엎드린다(드러눕는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죄)것이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가인은 제사문제로 날마다 아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틈만 있으면 아벨을 없앨 계획을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아시고 가인에게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네 안에 있는 계획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평생 동안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여기에서 (그)죄로 나오는데 이 죄는 구약성경에 약 300여회 나옵니다. 하타아는 사람에 대한 죄와 하나님에 대한 죄에 사용되었습니다. 하타아는 ‘죄의 상태, 유죄’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창 18:20). 세상에서 죄라는 것은 실정법을 어긴 것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법규에 위반이 되었을 때 그것도 법망에 걸렸을 때에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죄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타인의 권리에 대한 착취를 죄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궁극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뻘콥은 범죄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즉각적으로 일어난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다. 참된 근거로부터 떠났으며 또한 그 결과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였다(엡2:1).
가인이 동생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가인밖에는 모릅니다. 아벨도 모르고 아담과 하와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인은 죄를 다스려야만 했습니다. 가인이 소지하고 있는 죄는 갈망적이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아벨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죽이든지 해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자신이 손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죄를 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결과가 급격히 나타난다면 아마도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 급격히 적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죄는 악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호소하는 아벨의 피 (0) | 2012.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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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 (0) | 2012.03.24 |
가인과 아벨의 제물 (0) | 2012.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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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억제 (0) | 2012.03.20 |
가인과 아벨의 제물(창세기4:3-5)
4.[그리고]열납하셨으나(바이사) 여호와께서 아벨과(엘 하벨) 은(베엘) 그제물(미느하토) 5. 과(베엘) 카인은(카인 베엘) 그 제물(미느하토) 아니하신지라(로) 열납하지(사아)
성경은 “세월이 흐른 후에”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인 의미로“날들의 끝에”로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말합니다. 두 형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hj'n]mi 는 jn"m; [빌려주다, 선물을 주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선물 gift, 공물 tribute, 제물 offering'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드린 제물은 소제(민하)였습니다. 민하는 선물이란 뜻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도 의미하였습니다. (민하)는 야곱이 에서에게 (창32:14-22 창 33:21),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창 43:11, 창 43:15, 창 43:26) 준 예물을 (민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민하는 우월한 사람이나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세속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존경 혹은 복종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삼상 10:27에서 사울을 경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울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민하)는 제물이나 예물이라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민하(소제)는 특히 곡식 예물을 뜻하였습니다.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소제(민하)를 드렸습니다(창 4:4-5). 그러나 아벨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께 동물 중에서 가장 좋은 첫 것을 바쳤습니다. 가인은 땅의 수확물 중에서 민하를 드렸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저자들은 선택의 원리에 의하여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건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당대에 일어나 모든 일을 상세히 기록한 역사문집이 아니다”(요20:30-31)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나란히 놓았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열납하셨다(샤아)는 말은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그 제물은 바라보셨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바라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벨은 동물로 예배를 드려서 받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서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히 11:4을 보면 ‘믿음으로’라 했습니다. 즉 가인과 아벨은 믿음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형식적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은 받으시고 가인은 받지 않으심으로 보아서 예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바라보시고, 어떤 사람은 바라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시고 바라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복합적이지 않느냐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가인은 다시 잘 드릴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안색이 변하였다 하였습니다. 매우 분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자란 것입니다. 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면 가인은 큰일을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마치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 (0) | 2012.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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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려야 할 죄 (0) | 2012.03.23 |
가인과 아벨의 출생 (0) | 2012.03.21 |
죄의 억제 (0) | 2012.03.20 |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0) | 2012.03.19 |
가인과 아벨의 출생(창세기4:1,2)
아담이(베하아담) 그 아내(이쉬토) 하와와(에트 하우와) 동침하매(야다) 하와가 잉태하여(바타하르) 가인을(에트 카인) 낳고(바테레드) 이르되 하니라(바토메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이쉬) 득하였다(카니티) 2 그가 또(바토세프) 가인의 아우(에트 아힌) 아벨을(에트 하벨) 낳았는데(라레레트) 아벨은(헤벨) 양(촌) 치는 자(로에) 이었고(바히이) 가인은(베카인) 농(아다마) 사하는 자(이베드) 이었더라(하야)
하와는 출산의 고통을 가인을 낳았을 때 알았을 것입니다. 거의 죽음직전에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아직 죽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가인을 낳았을 때 해산하는 수고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아담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각 아이와 함께 어떤 새로운 희망이 오게 되었습니다. 가인의 이름은 그 안에서 새로운 출발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부모의 기대가 담겨있었습니다. 가인이란 이름은 ‘소유’입니다. 부모는 가인의 출생에서 그 아이를 큰 가치가 있는 소유로 보았고, 그 아이에게서 구속을 기대했습니다.
이로부터 여인의 후손은 계속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 죄가 확대되었습니다. 인류최초의 부모가 낳은 첫 아이의 속에서 죄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참 특이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죄는 사람들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가 교묘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오염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품과 성격의 타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거룩하지 못합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는 탁월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이제 이들은 죄가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을 것입니다. 죄의 기능들은 거룩하지 못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합치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성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간은 완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람의 이해력은 어두워졌습니다. 그 성정은 타락하였습니다. 그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습니다.
아담은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아벨이라 했습니다. 이 이름은 ‘무익’입니다. 여기에서도 죄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즉시 아벨은 양치는 자, 가인은 농사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농업과 목축업은 일찍이 이 세상에 존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다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가진 직업에서도 긴장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두 다 죄 때문에 빚어진 일들입니다. 죄는 서서히 가인의 마음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제 결정적일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낳은 인간의 마음속에 죄는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입니다. 저급한 전적인 타락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죄는 우리에게서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다스려야 할 죄 (0) | 2012.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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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제물 (0) | 2012.03.22 |
죄의 억제 (0) | 2012.03.20 |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0) | 2012.03.19 |
가죽옷 (0) | 2012.03.15 |
죄의 억제(창세기3:22-24; 마4:17)
사람이 아플 때 약을 쓰는 이유는 병균을 억제하려는 것입니다. 병균이 더 퍼지지 못하도록 약을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우주에 더 퍼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버립니다. 물론 이 땅에 아담으로 죄가 편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덴에서는 거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존 머레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된 활동들을 억제한다. 사람들에게는 거룩하지 못한 성정들이 있다. 이 죄의 잠재력들을 표출시키지 못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부패의 모든 격렬성과 폭력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으신다. Jonathan Edwards는 ‘하나님의 억제가 없다면, 지옥의 행동원리가 지배한다. 악인의 영혼속에 즉시 점화되어 지옥불로 불타오를 것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 속에는 바로 그 성질 속에 지옥의 고통을 위한 토대가 놓여있다. 지옥의 부패한 신념들이 존재하여 그 사람을 잡고 있다. 이러한 신념들은 활동적이며 강력하다. 죄의 성질은 과도하게 폭력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에 하나님의 억제가 없다면 그것들은 터져 나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패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의 사악함을 억제하신다. 죄는 본질상 파괴적이다. 하나님이 죄를 그대로 놓아두면 우리의 영혼은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결국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못하도록 막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죄도 짓고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엔 모두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같은 사람도 죄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열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살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인도하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죄의 억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종교들은 인본주의입니다. 생명 있을 동안에만 윤리와 도덕적으로 유효할 뿐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물 (0) | 2012.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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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출생 (0) | 2012.03.21 |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0) | 2012.03.19 |
가죽옷 (0) | 2012.03.15 |
하와라 불려진 여인 (0) | 2012.03.14 |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창세기3:22-24)
[그리고]가라사대(바이메르) 여호와 엘로힘이 보라(헨) 이 사람이(하아담)되었으니(하야) 하나같이(케아하드) 우리 중(미메누) 아는 일에(레다아트) 선(토브)악을(바라아) 이제(베아타) 할까 하노라(펜) 그가 들어(이쉬라)그 손을(야도) [따](베라카) 도(감) 나무실과(메에쯔) 생명(하하임)먹고(베아칼)생(바하이) 영(레올람) 22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바이살해후) 여호와 엘로힘이 에덴동산에서(미간) 갈게 하시니라(라아보드) 토지를(에트 하아다마 아쉐르) 그의 근본된(루카) [거기서](미삼) 23 [그리고]이같이 하나님이 쫓아내시고(바이가레쉬)그 사람을(에트 하아담) [그리고]두어(바이쉬켄) 에덴동산동편에(미케뎀 레간 에덴) 그룹들과(하크루빔) 화염검을(베에트 라하트 하헤레브) 두루도는(하미트하페케트) 지키게 하시니라(리쉬모르) 생명나무의 길을(에트 데레크 에쯔 하하올람) 24죄를 지으면 그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죄란 공동체를 와해시키며 국가를 와해시키며 사람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은 가장 탁월한 동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죽음도 없었습니다. 슬픔도 없었습니다. 고통 또한 없었습니다. 가장 살기 좋고 안전한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죄 값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담과 하와는 실감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좁힐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선악을 인식할 수 있는 영악한 도덕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범죄행위를 한탄하는 풍자의 말씀입니다. 칼빈은 “‘선악을 아는 일에’라는 것은 비참한 것을 시사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그에게 부여된 합법적인 수준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막았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쇠하여집니다. 죄로 인해서 이 땅에 병이 들어왔습니다. 여러 가지 인간들을 쇠약하게 하는 것들이 인간들의 죄로 인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면 인간들에게 엄청난 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타락이전에 애초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인간과 하나님 간의 정상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밀라드 J. 에릭슨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수많은 자연적인 욕망들이 있다. ①쾌락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욕구들을 갖게 하셨다. 이러한 욕구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본질적이며 즐거움을 준다. ②소유욕이 있다. 소유물을 획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는 인간의 임무다. ③성취욕이 있다. 이것도 자연적인 욕망이다. 적당하면 좋은데 넘어서면 이생의 자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도가 지나쳐서 수많은 것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가장 좋은 것은 예수님입니다. 욕심으로 예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로만 살아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출생 (0) | 2012.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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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억제 (0) | 2012.03.20 |
가죽옷 (0) | 2012.03.15 |
하와라 불려진 여인 (0) | 2012.03.14 |
아담에게 내린 형벌 (0) | 2012.03.13 |
가죽옷(창세기 3:21)
그리고 그가 지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엘로힘)이 아담과 그리고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들을 그리고 그가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 후에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tn<toK] 새로운 필요를 위해서 요구되었던 그 동물들은 원래 인간의 용도를 위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동물 몇 마리를 죽였다고 칼빈은 주석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이용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 동물의 가죽으로 자기들을 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자적으로 옷을 지으셨다는 말씀이 아니고 ‘사람의 처음 옷은 필요한 재단 방법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할 뿐이다. 이 옷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수치의 감정에 각성된 양심의 가견적 징표와 벗은 몸을 덮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복을 제공하셨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이미 합당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대책이 없으면 인간들은 꼼짝없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면전에서 아담이 설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아담이 당황함 없이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복을 제공하셨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재간과 수단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그의 부끄러움을 경감하지도 못했고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수치가 효과적으로 제거되게 하려면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복을 제공하셨던 것입니다.
가죽 옷을 입힌 것은 인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회복은 원래의 결백 상태의 회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회복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의 면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하기를 원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항상 떨며 당황해하는 회개자로 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아담이 느꼈습니다. 자중(自重)과 진보가 왔습니다. 율법과 명령에 대한 중시가 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의복과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협력하기를 요구한다는 표시입니다. 모든 선(善)에 있어서 인간을 진보시키고 진전시키기를 원하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의복은 인간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아담은 생명이 없고 느낄 수 없는 나무에서 잎을 땄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시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입혀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동물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은 값싼 것입니다. 죽음은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죽음을 죄의 형벌로 알았습니다. 죽음은 초기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풀에서 뜯어낸 잎사귀 한 다발로 가려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아담의 잎사귀 옷은 인간의 종교입니다. 그 옷으로는 도저히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옷으로만 수치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궁극적인 수치는 가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려야 할 전적인 무능력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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