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142건
- 2012.04.27
- 2012.04.25
- 2012.04.24
- 2012.04.22
- 2012.04.21
- 2012.04.19
- 2012.04.18
- 2012.04.17
말씀하시는 하나님(창세기8:13-19
물의 감한 여부를 측정한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땅위의 물이 걷혔습니다. 2월27일에 완전히 말랐습니다. 그 많던 물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제곳으로 물러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방주 밖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는 생물들을 이끌어내라 하셨습니다. 이제 그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노아는 2월27일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14절). 이 날짜로 노아가 만 1년 10일 방주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방주에 들어갔습니다(7:11). 601세 되던 해 2월 27일까지 방주에 있었습니다. 홍수의 시작부터 그 물이 줄어서 땅이 마르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기까지 1년이 약간 넘는, 370여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고 그 홍수가 줄어든 것에 대한 날짜는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정확합니다. 노아 600세 2월 17일에 홍수가 시작하여, 3월 27일까지 40일 동안 폭우가 쏟아지고 7월 16일까지 150일 동안 불어 올라있었다. 이 날부터 물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정확히 다섯달 만에 하나님께서 땅위에 바람(루아흐)을 통과시켰습니다. 물을 감하게 하셨습니다. 비를 그치게 하고, 깊음의 샘을 막았습니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닿았습니다. 이 날짜는 물의 증가의 끝과 결과적으로 물 감소의 시작을 표시해 줍니다. 물이 감소하기 시작할 때부터 일곱 달 열흘이 경과하여 땅은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원상회복의 기간이 긴 것은 대 이변의 크기를 입증해줍니다.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도덕적 통치의 목적을 위해 자연적 과정을 어떻게 이용하시는지, 물리적 동인의 격렬한 폭발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 뿐만 아니라 노아의 인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육지가 나타난 이후 40일까지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분명히 보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너무 성급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도 신앙의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노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하였을 때 지었습니다. 들어가라고 하였을 때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비록 “땅이 말랐다” 하더라도 방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두신 곳에서부터 급히 떠나거나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생활한 이스라엘처럼 우리가 천막을 치는 것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매사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우리에게 힘이 없습니다. 그림의 호랑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는 길입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해서 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좋아하지 제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싫어하십니다. 홍수에 멸망당한 사람들은 제고집대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사람입니다. 즉 순종이 사는 길입니다.
까마귀와 비둘기(창 8:6-12)
노아는 방주에 있은 지 열 한 달 십일 만에 새로운 세계의 확인을 위하여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었습니다.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내보냈습니다.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까마귀에 의한 그의 첫 조사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는 물 위에 떠있는 고기 찌기를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에는 들어오지 않고 방주 위에 앉았을 것입니다. 이어서 노아는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방주에 돌아온 비둘기를 7일 간격으로 내어 보내었습니다. 비둘기가 발을 놓을 곳이 없자 방주로 즉시 돌아왔습니다. 아직 바깥은 물이 많다고 하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다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다시 내놓았습니다. 비둘기는 연한 감람잎사귀를 물고 들어왔습니다. 이로써 물이 어느 정도 감한지를 알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7일 만에 비둘기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다시는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섭리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사이에 태양으로 물을 말리셨습니다. 바람으로 물을 말리셨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면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시려 역사하셨습니다. 전 지구를 물에 잠기게 하신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물을 말리셨습니다. 노아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보았습니다. 감람 잎사귀가 증거였습니다. 비가 멈춘 것이 증거였습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 증거였습니다.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향하신 손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침에 우리에게 해가 뜨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이 그 증거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입히시는 은혜가 그 증거입니다.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함께 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조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분만 계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분이 생명이고 그분이 소망이며, 그분이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창 8:1-5)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과 약속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IMF의 난국을 통해 우리는 국가신인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권념하셨다”하셨습니다. 기억하다 rk'z는 ‘기억하다, 상기하다 remember’를 의미합니다. 권념이란 ‘기억’과 같은 완전한 내적 활동을 말합니다. 적절한 외적 행동을 수반하는 내적 정신 활동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언급하다’는 의미를 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까지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언급한다’는 것은 기억이나 생각의 연장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권념하셨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노아를 권념하시니까 이제까지 내리던 비도 멈추었습니다. 깊음의 샘들이 막혔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노아를 권념하시니까 물들이 감하였습니다. 산들이 보였습니다. 노아는 지금까지 방주 안에서 무려 300일을 있어야 했습니다. 그 기간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밖에는 물이 창일했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출 2:24) 보전하시는(레 26:44-45)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셨습니다. 바람은 물을 감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권념하시자 깊음의 샘이 막혔습니다. 하늘의 창이 막혔습니다. 비가 그쳤습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150일후에 물이 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홍수 후 열달만에 물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이어서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습니다. 비로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은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강력하게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행동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 보존이란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은 그 모든 속성들 및 능력들과 더불어 그 존재의 지속을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심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지 않으셨다면 예수그리스도도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이 죽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속에 있는 노아를 권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세상 속에 있는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그러한 것들을 감하시는 분이십니다.
가공스러운 심판(창세기7:17-24)
17절을 보면 홍수가 땅에 40일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지구상에 물이 많아졌습니다. 당연히 방주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주가 물위에 떠다녔습니다. 19절을 보면 천하에 높은 산이 모두 물에 덮였습니다. 20절을 보니 물이 십오규빗(약7m)이 산위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물이 완전히 덮은 채로 150일(5개월)이 창일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방주에 있는 사람만 살 수 있었습니다. 카일·델리취는 15규빗에 대해서 “방주가 15규빗 정도 물속에 잠긴 것으로 알 수 있었다”고 말했으며, Open 성경은 “세계적인 홍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빠지는데 150일간이나 걸렸다”고 말했고, Calvin 역시 “모세의 기록목적이 전 세계가 물에 잠겼음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노아 때의 홍수는 혹자들 말대로 일부지역이 아니라 전 세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19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역사하고 계시지 않는 때라도 그의 임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확실히 일하고 계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합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 얼마동안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날자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방주를 닫아 넣고서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사실 노아가 방주 속에서 어떻게 될까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노아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은 없었습니다. 노아는 자기 자신이 상자 속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무런 표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에 처할 때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최선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표준에 대해서 루이스 뻘콥은
성도들과 죄인들이 심판 받는 표준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된 뜻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특권을 지녔으므로 이것은 자연적으로 그들의 책임성에 첨가가 된다(마 11:21-24, 롬2:12-16). 이것은 사람들의 상이한 계층들에게 구원의 상이한 조건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판에 나타날 모든 사람들에게 천당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거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느냐의 여부에 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형벌의 정도에는 각기 차이가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정도들은 육체에 행해진 것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수십억 인구를 홍수로 쓸었습니다. 왜 입니까? 죄악이 관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두었다가는 지구가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서 더는 두고 볼 수 없으셨기에 그들을 홍수로 쓸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지극하신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수십 억 명을 몰살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1656년이나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하나님의 요구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제(창 7:13-16)
16절을 보면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닫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다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으시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종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학(信學: 자기들이 믿는 교리)이 있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종교도 있고,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종교도 있을 것이며, 새로 만든 종교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죽은 신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혼을 불어넣어서 마치 이생을 주관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또 속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을 하나님이 닫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생명의 문을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해도 어떤 신이 방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쓸어도 어떤 신이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의 가족과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간 것은 2월 10일이었습니다. 그리고 7일 후, 즉 2월 17일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면은 온통 홍수로 뒤덮이게 되고 방주는 물 위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홍수 기사에서 당시 사람들의 사투에 대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르짖는 절망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불어나는 물결 앞에 두려워 도망치는 자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들처럼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들의 심한 고뇌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때늦은 후회로 그들은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냥 노아의 말대로만 했으면 되었는데’하고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심판은 결정된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안전한 방주 안에서 파멸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바라본 한 의인의 슬픔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노아의 경험은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쉽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을 많이 느낍니다. 구원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우리의 신앙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난국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병약한 몸, 질병, 의기소침, 좋아하는 계획들이나 바람직한 사업의 실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옛 소욕들에 대하여 정해놓은 어떤 뚜렷한 표징없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내버려질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이 세상과 모든 역경과 유혹의 물결들을 혼자의 힘만으로 물리쳐야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까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표징을 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고 노력을 해도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네 위에 있다고 말해주는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의 생애의 대부분을 이러한 상태로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잘해 나가려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한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챨스 하지는 하나님의 보존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주전체는 스스로 존재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를 멈출 것이라 하였습니다.” 노아는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역시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고 보존하심이 없다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홍수 심판(창 7:6-12)
홍수이야기는 대칭구조로 되어 있습니다.1
가. 7일 동안 기다림(7:4)
나. 7일 동안 기다림(7:10)
다. 40일 동안의 홍수(7:17)
라. 150일 동안 물이 범람(7:24)
라′. 150일 동안 물이 빠짐(8:3)
다′. 40일 동안 기다림(8:6)
나′. 7일 동안 기다림(8:10)
가′. 7일 동안 기다림(8:12)
홍수심판의 예고는 노아가 480세 때였습니다(6:3). 홍수심판은 노아가 600세 된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이 죽은 지 726년 된 때였습니다. 므두셀라가 969세 때입니다. 노아의 여덟 명이 먼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 기는 것 등이 모두 들어갔습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동물들을 몰아 방주 속에 들여 넣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방주에 짐을 실을 때가 왔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이 맨 먼저 승선했습니다(7절). 그다음 하나님은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모인 동물들이 그 명령대로 방주 속으로 행진해 들어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노아 방주가 약 45,000마리의 동물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어림잡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얼마나 오랫동안 이 많은 동물들을 모았을까?’라고 놀랍니다. 실제로 피조물은 노아와 일치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동물들을 모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노아가 그의 맡은 사명, 곧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 일을 돌보셨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고 동물들은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노아와 정반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나 관리할 수 없는 생활 전반에 대해 염려합니다. 걱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통제와 관리 하에 있는 것들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소홀히 합니다. 관계를 소홀히 하며, 책임 등과 같은 특정한 영역을 소홀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들에 전심전력하여야 합니다. 나머지 일들은 하나님께 맡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탄성을 발할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판계획을 노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6:13-7:4). 그후 다시 노아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말없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7:16). 홍수가 끝날 무렵 방주를 기억하십니다(8:1). 8:15에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 기간에는 공포의 파도였습니다. 이것은 심판받아 죽어간 사람들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지 7일후에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창들이 열렸습니다. 깊음의 샘들이 터졌습니다. 위에서는 쏟아지고 밑에서는 올라왔습니다. 이것은 지진이 나고 바다가 갈라지며 육지가 갈라져서 숨겨졌던 물이 올라온 것입니다. 궁창위의 물들과 궁창아래의 물이 다시 만난 것입니다. 120년의 전도가 이제야 효력이 난 것입니다. 아마도 방주 밖에서는 사람들이 홍수를 만나 아우성이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쏟아진 물들과 솟아올라온 물들로 인해서 온 땅이 난리였습니다. 때늦게 그들은 노아의 전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늦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닫은 문을 다시는 그들에게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점점 불어나는 물들로 인해서 산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피난처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후회를 했지만 늦었습니다. 기회는 한번입니다. 우리가 숨이 붙어 있는 그때가 기회입니다.
1 목회와 신학 편집부.『창세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05.
방주로 들어가라(창 7:1-5)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의로움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죄인인 노아를 어떻게 의롭게 보셨습니까? 의로움(차디크)은 ‘올바른, 공정한’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세대는 패역한 세대였습니다. 패역한 세대란 눈뜨고 보지 못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조사(라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의로움을 보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께서 불의하시지 않으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밀라드 J. 에릭슨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순결성의 두 번째 차원의 속성은 의로우심이다. 말하자면 이 속성은 그분의 거룩하심의 속성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용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하나님의 본성의 진정한 표현인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께서는 옳은 것들과 자신을 순종하는 신자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오게 할 것들만을 명령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또한 자신의 행동이 정해놓은 율법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행동을 옳게 행하시는 것으로 묘사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시대에 맞게 살았지만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바라보고 그에게 방주를 건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홍수를 피하게 하려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 때 홍수는 전무후무한 홍수였습니다. 노아는 정결(타호르)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여 방주에 취했습니다. 오랜 후에 모세의 율법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명확히 하였습니다. 노아는 정결한 동물들 “일곱씩”(낱으로 일곱:세쌍과 한마리); 부정한 것들을 “둘씩”(한 쌍) 취했습니다. 정결한 동물을 세 쌍과 한 마리를 취한 것은 홍수 후에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가족들의 식량이었습니다. 노아에게 조류까지 취하라는 명령은 그 홍수가 전 세계적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지구가 물에 덮였을 것이며 새들이 착륙할만한 여하한 장소도 남겨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방주입니다. 방주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멸망하지 않습니다. 노아처럼 순종해야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어기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싫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싫고, 예수님이 싫으면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심판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노아의 순종 (창 6:17-22)
홍수( !~yIm'~ lWBM'h) 마소라 본문에는 ‘물들’을 뜻하는 ‘마임’이 뒤따르고 있어 문자적으로 ‘홍수의 물들’입니다. ‘기식’ j"Wr는 ‘바람, 호흡, 영’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호흡을 의미하며 호흡을 하는(육체)를 말합니다. ‘홍수의 물들’과 ‘기식 있는 생명’은 상극입니다. 홍수 속에서 숨을 쉬는 생명은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홍수의 물들로 숨을 쉬는 모든 생물들을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에 적극 순종하였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7:5)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7:9)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생명의 약속으로 간주하였다. 하나님의 pathos를 받자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노아는 그의 감정을 뒤따랐습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예비하신 방주로 피난해야만 합니다. 노아는 미래가 파멸과 구원이라는 이중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그의 전(全) 삶이 결국 그를 도피하게 하는 행동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완벽하게 인식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주위의 생활 사건들보다도 멀리 있는 홍수가 더 실재적이었습니다. 노아는 모든 조롱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만일 미래가 사실이 아니라면 정말 노아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생의 과정에 자기를 모두 내맡겼습니다.
경고와 홍수 사이에는 12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내내 많은 사람들은 이전과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사명의 길만 걸어갔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을 이처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노아는 우리보다 더 불충분한 것을 믿었습니다.
노아와는 달리 그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홍수심판에 대해 비웃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120년 동안 당시 사람들에게 재난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하며 회개를 전파했습니다. 재치 있는 사람들은 노아와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상식적인 사람들은 노아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계속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것을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오늘의 상황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을 경고 받고 있으나 아직도 그들 중 대부분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란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합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우리의 사명을 더욱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노아를 평가하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라는 것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이 듣는다는 것은 굉장히 복된 일입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준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홍수 속에서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약속이 같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홍수심판 (0) | 2012.04.19 |
---|---|
방주로 들어가라 (0) | 2012.04.18 |
방주의 설계 (0) | 2012.04.16 |
부패하면 멸망당한다 (0) | 2012.04.15 |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0) | 2012.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