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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로하심(창세기5:25-32)

라멕이 182세에 노아(j'nO)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j'n:)하였습니다.

취직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대학교를 나와도 어디에 취직할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월 100만의 급여를 받을 만한 자리마저도 쉽게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IMF로 한번 얼어붙은 경제는 여간해서 일어서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일해야 얻은 수확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가정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한번 엎어진 경제는 여간해서 일어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고로이 일해도 얻는 것이 없거나 적습니다.

라멕은 노아의 이름을 지으면서 예언을 합니다.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j'n:/nāham)하리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라멕이 자신에게 그의 노동의 경감이나 위로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면서 라멕이 제유법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고는 비참한 인생의 역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 인생이 비참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땅은 갈수록 처음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땀을 흘려 수고해야 겨우 연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파문을 당한 것입니다. 땅이 장애물로 에워싸여 인간에게 풍요가 금지되었습니다. 흙의 생산성인 풍요가 금지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소득이 없는 땀들을 많이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땅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고로이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도 엉겅퀴를 수확해야 했습니다. 즉 우리의 가정경제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사는 것이 순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인정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U-turn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U-turn하지 못하는 삶은 현생애에서도 다가오는 내세에서도 엉겅퀴를 수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utopia를 꿈꾸며 이생을 계발한다하더라도 엉겅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예수님께 가야 수고와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수고라도’ 하나님께서 안위하시면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위하심은 형세적일뿐만 아니라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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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창세기5:9-24)


에녹은 ‘전수자’라는 뜻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칠세손으로서 최초의 전도자입니다(유14-15). 그는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전파했습니다. 그의 생애의 두 가지 특징은 그의 거룩한 생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입니다.

jl'v,Wtm/m-t?shellah/므투셀라]는 ‘보낸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보내는가 심판의 홍수입니다. 므두셀라가 살아있을 때는 홍수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홍수는 정확히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죽는 날 홍수를 보내리라'가 곧 므두셀라란 이름의 의미입니다. 동행하며 &l'h; 는 ‘가다’, ‘걷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관련한 행동을 말하는. 경건한 자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거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힛파엘형을 사용한 것은 동작의 연속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뜻을 따라 그를 기쁘게 하는 생활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 때부터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성경은 이 변화의 이유나 방법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 어떤 啓示로 변화가 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에녹은 아들의 출생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그 시대의 암흑을 보았습니다. 곧 죄악의 비극적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운동을 이해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읽어야 합니다. 일반계시이든지 특별계시이든지 그 계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애를 쓰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등록을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먼저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순서가 맞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내가 좀 모자란다 하더라도 그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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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계보(창세기5:3-8)

.tmoY:w" hn:v; !yvilv]W hn:v; t~/ame [v'T] yj' Arv,a} !~d:a; ymey] AlK; Wyh]YIw"

그가 구백삼십세를 향수하고(살다가)죽었더라

낳아(dl'y:)는 좁은 의미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때로 는 아버지 편에서 부모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모든 실례에서 실제의 부성(paternity)은 사역어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와 같은 보다 일반적인 관계는 단순능동형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히필형으로 사용되어 “낳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담이 셋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셋이 자기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교회의 기원을 말하는 것도 되지만 동시에 ‘그 성품이 부패하고 오염된 성품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의 성품이 대대손손 전해져 그로 인해서 끝내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문자적으로 ‘아담이 산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년이었으며 그리고 그는 죽었다’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정녕 죽으리라(죽고 죽으리라; 창 2:17)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은 아닙니다. 영원이라는 복을 인간에게 내리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존 머레이는 인간을

그것(무능력)은 본래 사람에게 속해 있지 않았다. 사람이 자신의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일 수 없고 어떤 것이 될 수 없고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죄로부터 발생하는 도덕적 무능력을 구별해야 한다. 본래 상태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능력은 사람이 죄 가운데서 모든 선을 싫어하고 적대하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달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적으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분별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의 빈약함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의 빈약함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본다. 즉 인간이 자신에게 속한 것은 어느 하나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가 헛된 자만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우리의 조상이 했더라면 지구의 환경은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사람살기에 최적합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아담에게 주어진 최상의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죽음이 오고 약함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해서 둘째 아담이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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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계보(창세기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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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자손(톨레도트)의 계보(기록)가 이러하다. 하나님이 사람(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그를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데무트)대로

모세는 택하신 백성의 족보를 기록하기에 앞서서 곁가지의 족보를 먼저 간단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즉 아담의 족보에 앞서 가인의 족보, 이삭에 앞서, 이스마엘을, 야곱의 족보에 앞서 에서의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이 계보를 기록하는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비록 수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경의 족보는 성경 역사를 전달하는 기본형식입니다. 계보는 어떻게 한 세대가 그 영향력과 능력을 확대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또는 역사가 수세기를 통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의 사건과 세대는 성경 역사의 주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더불어 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그의 백성과 관련된 사건들을 중심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계보 역시 이런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계보는 역사의 골격이 되는 개요를 제공함으로 이야기의 기억을 도와줍니다. 히브리인들은 구전(oral trandition)을 통하여 신앙을 전수했습니다. 기록 전승 이전 단계나 시대에서 어떤 사건을 이야기로 자녀들에게,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계보는 수세기 동안 첨가되면서 대대로 전수되었습니다. 가족의 전승보다 더욱 중요한 계보들은 오실 메시야의 계보입니다.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혈족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확증하는 역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계보는 일체감을 상기시켜 줍니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동일 혈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같은 피와 살을 나눈 인류의 가족입니다.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귀중하고 비길 데 없는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보는 하나님의 흥미로운 특성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그들의 수명과 후손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수가 엄청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경영하시는 것도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앞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의 앞에 문제를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형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창1:26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Wnmel]x'B]) 우리의 모양대로( Wnte=Wmd]Ki)···’

초기의 신학자들은 이 용어를 구별했는데 LXX역 번역이(eijkwvva kai; oJmoivwsin; 형상과 모양)으로 되어 있고, 라틴어 벌게이트 역에도 두 단어 사이에 et(과)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Irenaeus와 Tertullian은 앞 단어(첼렘)는 신체적 특징들을 가리키고, 뒷 단어(데무트)는 사람의 영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와 오리겐은 이러한 이해를 거부하고, “형상”이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특징을 뜻하는데 비하여 “모양”은 사람의 “사람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나 수련되거나 상실될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Athanasius, Ambrose, Augustine, 다마스커스의 John은 그들의 시대에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했다. 중세시대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 명사들 간의 구별을 계속해서 강력하게 주장하여, ‘형상’은 이성과 자유의 지성적 능력들을 함축하고 있고, ‘모양’은 원시적 거룩과 의로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로마카톨릭의 신학에서는, 사람은 타락할 때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양’을 상실하였으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은 거룩과 의로움 등 ‘추가적 은사’들을 본질적으로 상실하였으나 도덕적으로 인간 전체는 부패되지 아니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할 성향의 상태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두 단어들을 구별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로움이 인간의 참된 본성에 본래 있다고 생각했다. Luther는 전적으로 원시적 의로움의 관점에서 형상을 이해하여 아담이 타락하던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Calvin은 하나님의 형상이 주로 마음 곧 영혼과 그것의 능력들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도, “사람의 어떤 부분도, 심지어는 신체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형상의 영광의 광채로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 재능들뿐만 아니라 원시적 의로움의 영적 자질들 곧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을 포함하였다. Calvin에 따르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체 형상이 영향을 받되, 원시적 의로움만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Calvin의 견해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온바 형상에 대한 신학적해석이다.

오늘날에는 ‘형상’이 형식적으로는 인격의 관점에서(이성, 감정, 그리고 도덕적 책임성) 정의되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자의 경우 크게 약화됨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일에 실수가 많고 감정이 침체되기 쉬우며 도덕적 책임에 있어서 오판하는 일이 있게 되는가 하면, 후자의 경우는 (전적으로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심각하게 뒤틀려 버렸다. 하지만, 타락의 결과들이 형상의 두 영역에서 가공할 만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의를 사랑하는 일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의미로 바울이 그들의 죄 가운데 “죽었다”고 사람들을 묘사한 것은 온당하다할 수 있다. 그럼에도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참된 형상”곧 완전한 모양이었다. 허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된 ‘형상’으로 참된 의와 거룩과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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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의 출생(창세기4: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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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이 셋을 낳았습니다. 셋(tve)은 ‘보상’입니다. 셋은 아담의 셋째 아들이며 에노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912세에 죽었습니다. 아벨 대신 셋을 주심으로 여자의 후손(3:15)에 대한 약속을 이루어 나갑니다. 에노쉬(v/na>)라는 의미는 인류(mankind)라는 의미의 인간(man)을 의미합니다. vn"a;(약하다, 병들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기본적 강조점은 인간의 ‘약함이나 필멸성’을 뜻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인간의 타락 이래 처음입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기도와 흠모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본능적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는 인간의 창조와 함께 본성의 지시, 곧 창조주가 짜 넣은 타고난 본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과 경건의 예배를 모든 제사보다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배는 믿음으로 드립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 점에 착안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흐리게 할 목적으로 백방으로 날뛰고 있습니다. 즉 불합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개인 기도의 시작이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예배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에노스가 출생한 전후 시대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았을 때입니다. 가인과 라멕에서 타락한 양심의 행위를 보았습니다. 죄악의 비극적 영향과 죄와 죄인들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을 때입니다. 가인과 종교를 버린 자들은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불신앙과 반종교를 선언하기 시작하여 자신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항상 사단은 하나님을 흉내를 내는데 천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연약을 의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려 했습니다. 그의 뜻을 행하려는 자들로 구별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그의 예배를 선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여호와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의식을 새롭게 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존 머레이에 의하면 인간의 무능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능력은 사람이 죄 가운데서 모든 선을 싫어하고 적대하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달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적으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분별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셋의 후손들은 죄 중에서도 경건했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들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역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앞에 나아가서야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표시이며,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며, 하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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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후예들(창세기4:18-24)

가인(소유)의 후예는 가인(시작)이 에녹을 낳았습니다. 에녹은 이랏을 낳았습니다. 이랏은 므후야엘(하나님께서 치심)을 낳았습니다. 므후야엘은 므드사엘(하나님의 사람)을 낳았습니다. 므드사엘은 라멕(강한 자)을 낳았습니다. 라멕에게는 아다(장식)와 씰라(그림자)였습니다. 아다는 야발(개울)과 유발(기쁜 소리)을 낳았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대장장이)과 누이 나아마(즐거운)를 낳았습니다.

가인의 세 아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주도로 당시의 문화가 주도되었습니다. 야발은 최초의 목축업자였습니다. 그는 살기 좋은 곳이면 어디나 거처를 옮길 수 있는 장막을 만드는 최초의 건축업자이기도 했습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은 최초의 음악가였습니다. ‘대장장이 두발'은 실용예술의 창시자였습니다. 그는 동철로 도구를 만드는 모든 이의 스승이었고, 인간의 문화를 위한 도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예술을 촉진시켰습니다. 전쟁무기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흔히 세상에서 유행되는 것들을 창안하였습니다.

라멕의 가문에서 가인의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힘을 길렀습니다. 강퍅과 완악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행복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성공을 거두어서 몇 세대 만에 문명화된 생활의 모든 필수적인 것들을 갖추는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사람의 교만은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도전적인 상태나 야수 같은 잔학한 성품은 문화의 발전과 그 영향으로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계통에서 계속 살인이 이어졌습니다. 이 살인은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라멕은 조그마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라멕은 살인자 가인이 복수를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당방위로 살인한 자기는 더욱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살인에 대해 전혀 가책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를 죽이는 자는 그 형벌이 가인의 경우보다 10배나 많은 칠십 칠배라고 교만하게 호언장담했습니다. 라멕의 이 말에는 그의 살인행위가 자기를 상해한 자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형벌이요 보복이라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점점 죄가 확산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범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라멕이 또 사람을 죽였습니다. 루이스 뻘콥(L. Berkhof)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대해서 말하기를 ‘선천적인 타락은 인간성의 각 부분에, 즉 영혼과 신체의 모든 기능과 능력들에 확대하고 있다. 또한 죄인 안에는 영적인 선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선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타락만이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인간의 타락은 점점 갈수록 도를 더해갔습니다. 이것을 면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더 멀리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길이고 세상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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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앞을 떠난 가인(창세기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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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의 (그)얼굴을 떠나가서 에덴동편 놋 땅에 거하고 있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났습니다. 즉 ‘가인은 정죄를 받을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석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중지하시자 그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만 한 곳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옮긴 것입니다.’ 놋(누드)이란 “방황하다”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이 놋 땅에서 방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치욕스러운 형벌은 여호와의 앞을 떠난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님 앞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개시 시작”이라는 뜻의 에녹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을 쌓아서 에녹성이라 부르면서 그 안에 살았습니다.

가인의 정신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정신입니다. 그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벨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유리하는 자가 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주를 받아 방랑자로 쫓겨다니지만 “앞으로는 방랑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정착지를 정하여 그곳의 주위를 칼날 같은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아무도 나를 공격할 수 없게 할 것이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녹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방랑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소망 없는 도망자입니다. 그의 마음은 안식을 찾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안식이었습니다. 가인은 불행하게도 그 도시에서 그는 자신과 사람을 위하여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전의 것들을 모두 잊었습니다. 옛 고향과 거기서 섬기던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떨쳐 버렸습니다. 가인은 지혜롭게도 자신의 이름으로 도시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이 그의 과거 생활이나 경력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옛 생활을 단절했습니다. 그의 범죄도 숨겼습니다. 그의 하나님도 잊었습니다. 그의 옛 생활에 속한 모든 것은 더 이상 그와 그의 동료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베일에 싸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가인은 명확한 출발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위대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도록 그의 도시를 "에녹" 즉 '시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것은 좋은데 가인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솔직하게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찾고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인 같은 안식은 진정한 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안식은 초호화궁궐에 산다 해도 안식이 아닙니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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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운명(창세기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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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네가 저주를 받으리니)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에서 저주(rr"a;)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흙으로부터 파문당했다는 것으로 ‘그는 흙의 생산성(풍요)를 즐기는 것을 금지 당했다’는 뜻입니다. 땅이 가인에게 효력 j'Ko(땅이 산출할 수 있는(잠재)능력)을 주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가인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피하며(['Wn) 유리(dWn)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인은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4:13). 자신의 죄벌이 너무나 무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하였습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의 죄의 벌로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고통스럽고 보답 없는 저주와 부모 형제로부터 쫓겨나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운명을 선고받았습니다.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은 가인을 거부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밭을 갈아도 그 수고의 보답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어쩔 수 없이 방랑의 길을 걸어야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에 대한 세속적인 형벌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도망자요 부랑자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여전히 방랑자이긴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순례자이며 하나님과 함께 체류하는 자’입니다.

가인의 회개가 없는 절망적인 비극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백하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응징을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자기의 죄를 깨우쳤더라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오직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어떠한 죄인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감히 그쪽으로 갈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낙심하게 합니다.

가인의 형벌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함에도 추방령이었습니다. 여전히 회개의 여지가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흉악범 가인이라도 그가 받은 응징에 은혜로운 보호와 자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심판하시고 적절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분노나 복수심에서 그리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벌은 우리를 바로 잡아서 하나님과 우리의 친교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끝없는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회개하면 어떠한 죄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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