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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젊은이가 인간이라는 고유의 품성을 하직하고 죽음을 연습하고 죽임을 배우는 병사로 교육한다. 따라서 병사는 관습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병사들의 중요한 감정은 상관에 대한 봉사이다. 상관이라는 사람은 영내에서 전제주의를 교육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전제주의는 자기의 목적을 폭력으로 달성하기 위해 이웃의 권리를 노리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사들의 주된 만족은 모험이고 폭풍우 같은 위험이다. 결국 그들은 평화로운 노동에는 등을 돌리게 된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고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어 간다. 전쟁에 이긴 국민은 승리에 도취되어 또 새로운 승리로 향하여 나가려 하며 패전의 고배를 마신 국민은 그들의 명예와 손실을 회복하려고 서두른다. 서로 물어뜯고 분노에 미친 국민은 서로 상대방의 멸망을 바라며 적국에 질병이나 기아사고나 내란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따라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이런 국민 사이에는 괴로운 고뇌가 아니라 승리의 기쁨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이 거리거리에 전광 등불로 번쩍이게 하고 방방곡곡에서 큰 잔치가 벌이는 축제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지고 사악한 욕심을 길러낸다. 결국은 동정이나 인도적 감정을 잃어버리게 한다.

전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무서운 살인마들이다. 폭탄 한 개마다 수십 명 내지 수천 명의 목숨이 죽는다. 한 명의 전쟁광 때문이다. 저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지만, 그 전쟁이 참혹하여 자기의 자녀들은 절대로 전쟁터에 보내지 않을 비겁한 자들이기도 하다.

-찬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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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 중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악이 가장 크다. 대개의 젊은이들은 고귀함과 위대함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의욕을 차버리고 타인의 의로운 욕망을 위한 도구의 역할이 되어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든지 굶주림과 목마름과 비바람이나 한서 때문에 고초를 당하며 불구가 되어도 그 연유를 초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여한다. 또 죽은 뒤의 불멸이나 신문이 제멋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영광 따위와 덧없는 찬사에 웃고 웃지 않는다.

총소리가 난다. 그는 부상당해 쓰러진다. 전우들은 그를 군화로 짓밟고 전진하므로 그대로 죽어간다. 아직 숨이 붙어있던 그 병사는 그 자리에서 불멸의 죽음이라는 고마운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전우들도 친척들도 그의 죽음 따위는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병사가 자신의 행복과 고뇌와 인생과 모든 것을 바쳤던 그 죽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2, 3년 지나서 누가 그의 백골이라도 찾아내면 그 백골로 영국식 구두약이 만들어져 그가 소속했던 군대의 장군이 구두를 그것으로 닦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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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문필가 도스토옙스키를 배출한 나라, 국기 하단의 노랑색이 곡창지대를 뜻할 정도로 비옥한 흑토 덕분에 '유럽의 빵 바구니'로도 불리는 나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지금 국제 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어떻게 우크라이나를 지켜내고 세계를 단합시켰나' 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내고 그의 지도력을 조명했습니다. 타임은 러시아의 침공 5일째인 지난 3월 1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의회에서 “삶이 죽음을 이길 것이며 빛이 어둠을 이길 것”이라면서 유럽 각국의 협력을 촉구하는 연설을 두고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한 것 같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를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으로 표현했다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 견준 것입니다. 지난 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만 해도 하루나 이틀 만에 수도인 키에프가 함락될 것이라고 전 세계는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항공편을 제공할테니 망명할 것을 권했을 때 그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군복을 입고 나와서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망갈 항공편이 아니라 더 많은 탄약입니다.” 라면서 각료들과 함께 수도에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의 결기에 찬 말 한마디에 전 세계는 감동했고, 우크라이나 국민 13만 명이 자원입대했으며,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습니다. 용감한 지도자에겐 용감한 국민이 있는 법인가 봅니다. 한 시민은 러시아 탱크 앞에서 온몸으로 탱크를 막아 세웠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선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에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내가 응원하는 최고의 인물이다.”

“캡틴 우크라이나” 이런 칭송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키예프의 한 신문은 “국민들은 그를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초대 대통령’이라고 부른다"고 전했습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한 직후 가족과 함께 이웃 나라로 도주한 아프간 대통령의 모습. 그 결과 미국이 20년 동안 도와준 나라가 단 이틀 만에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는 비참한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보았고,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보았고, 국민다운 국민을 보았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같은 대통령을

대한민국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마도 국민 모두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일 것입니다. 이 말이 틀렸다면 '아마도'라는 말 때문일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콜라 리센코가 작곡하고, 민족주의 작가 콘니스키가 가사를 쓴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몰리뜨바 자 우크라이누)라는 곡이 있습니다. 제2의 국가 같은 노래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나니 우크라이나를 지켜주소서. 그들에게 자유를, 그들에게 행복을, 그들에게 선량한 세상을 주소서.” 우크라이나의 4인조 팝그룹의 보컬 미하일로 코마가 부르는 이 곡을 들으시면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을 위하여 잠시나마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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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공정을 말하고, 말로만 정의를 외치며, 말로만 미래를 말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말뒤에 바로 따라붙어야 하는 것이 행동이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과거의 행동이 그러해야 한다.

​                                Pear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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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9-28 2022.2.27
 
사람이 고집이 세며, 완고하고, 우둔하여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碧昌호라고 합니다. 본래는 碧昌호가 아니고, 碧昌牛입니다. 碧昌牛가 시간이 흘러 碧昌호로 바뀌었습니다. 碧昌牛의 碧昌이란, 평안북도의 碧潼郡과 昌城郡을 의미합니다. 이 두 지방의 소가 덩치가 크고 성질이 억세다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碧潼, 昌城 지방의 소처럼 고집이 세고 우둔하여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原則主義와는 다른 말입니다. 원칙주의는 나름대로 정해진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벽창호 유형의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사람이 벽창호이면, 주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이 벽창호이기까지 한다면 말 그대로 큰일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은 민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주전 7세기에 시행된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의하면 합법적인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예배 중심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간에 성전이 제거됨에 따라 구약 종교를 유대교로 수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때부터 모세가 받은 율법이 삶의 규칙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규범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의 정책도 주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헬라화 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제사장들도 헬라화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성전예배는 기쁨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감에서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오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만 하더라도 수백 개의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곧 유대교의 교리는 철벽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만 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계시한다고 여겼습니다. 선지서들을 법에 대한 해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존재의의를 가졌습니다. 이들에게 모세오경은 성문화된 율법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원칙들을 매일의 삶에 적용할 필요에 따라 구두 율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성문 율법에는 적극적인 명령 248개와 소극적인 명령 365개 등 모두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계명들을 일일이 준수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은 올바른 마음가짐곧 윤리를 강조함으로 완화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원죄에 관한 기독교 교리와는 무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비해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을 덜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임할 세계에 대한 유대교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에 관한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성육신의 개념도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Messiah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한정적이었습니다. 현재 유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점령군의 사령관이고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씨저보다 더 강력한 Messiah여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백마를 탄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을 일시에 격파하고 자신들을 신하로 삼는 power-king Messiah를 기다렸습니다.

요한복음1:1절에서 18절까지 narration이 청중에게 이야기하듯이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이 태초에 함께 계셨다. 만물 곧 우주가 그 말씀으로 인하여 지어졌다. 어떤 것도 안 만드신 것이 없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왜 빛이 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인물이 바뀝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다. 그 이름은 세례요한이다. 저는 이 땅에 증거 하러 왔다. 하나님께로서 온 빛에 대하여 증거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의 증거로 인하여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세례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다. 오직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것뿐이다.

다시 그 빛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그 빛은 참 빛이라 했습니다. 참 빛을 말했을 때엔 거짓 빛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짓 빛은 사람들이 만든 빛입니다. 그러나 참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빛이 죄인들에게 비취었다. 그 빛이 애초에는 하늘에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에 계셨다. 세상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상 곧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기 땅 곧 유대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을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실제로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는 인간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19절을 보면 갑자기 세례요한이 유대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이 마태복음3:1-12입니다.

1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은 어떤 기적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요.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눅1:5).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을 위한 유일한 자격은 혈통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국자들의 안목으로 볼 때 세례요한은 사실상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왜 이런 비정상적인 처신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찾아 왔습니다.유대인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다르게 표현하면 당시 종교문제에 실권을 잡은 자들은 실태조사를 하러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네가 Messiah냐? 아니면 네가 Elijah냐? 혹은 그 선지자냐? 이들이 말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입니다. 모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산헤드린 곧 예루살렘 공회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는 거짓 예언자로 혐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은 세례요한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그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통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설교자의 통념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Messiah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Messiah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신 Messiah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사로잡힌 바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구해 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을 Messiah냐고 물은 것입니다. Messiah에 대한 관념을 그들은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의로 다스릴 분이 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백마 탄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적 위대한 戰士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씨저보다 더 위대한 분이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어떤 초자연적인 인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계열에서 한 군왕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자칭 Messiah라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요한에게 와서 그가 Messiah인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주장을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암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헬라어로 나 ejgw;(egô)란 말은 그것이 놓여지는 바에 따라 그 뜻이 강조됩니다. “Messiah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나는 절대로 Messi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Elijah냐?고 물었습니다. 말라기4:5-6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Elijah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전하고 세상이 그를 영접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Elijah가 오리라는 것이 유대인의 신념이었습니다. 특별히 Elijah는 반대자를 처리하기 위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물건이건 사람들이건 간에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lijah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죽인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다시 한 데 모으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율법이 소유자가 분명치 않아 서로 다투고 있는 금전이나 재산 혹은 소유자가 밝혀지지 않은 재산은 어떤 것이든지 “Elijah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이 일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Elijah가 오리라는 신앙은 말라기4: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모든 왕이 다 그러했듯이 Elijah가 Messiah의 즉위 때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Elijah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그 새 왕국에 참여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Elijah의 정신과 능력으로 나아갔습니다(눅1:17).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Elijah라고 일컬으셨습니다(마17:12).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Elijah는 아니었습니다. 단연코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신명기18:15-18을 보면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기다리고 있던 약속된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때때로 Messiah가 오실 때는 Isaiah나 Jeremiah가 다시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모세가 신명기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준 보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보다 뛰어난(par excellence) 예언자가 오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히 계시해 줄 한 선지자 곧 Messiah를 말합니다. 이 선지자는 모세와의 연관성 속에 율법해석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니게 될 Messiah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해진 이 선지자는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의 대속자로 오실 Messiah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Messiah입니다. 모세는 선지자로서 여호와와 직접 대면한 자입니다. 애굽에서 이적을 베푼 자입니다. 권능과 위엄을 백성 앞에서 나타냈습니다.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자입니다. 계시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 모세에 필적할 만한 선지자가 곧 Messiah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그 선지자냐고 물었을 때 그러한 영광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오직 예수님 앞서서 오실 길을 다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인용절은 이사야40:3절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 귀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 들어있는 관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동방의 도로들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갈이 깔려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밟아서 다져진 길들이었습니다. 왕이 어느 지방에 순시하러 갈 때나, 정복자가 자기의 영토를 지나가려고 할 때 그 길을 미리 다지고 곧게 정리하였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말하는 소리일 뿐이다. 세례요한은 또 “왕이 방금 오시고 있으니 스스로 예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은 인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세례요한에게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개척교회 수준인데, 세례요한은 대형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일을 전혀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망각하고 오직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사해보니 세례요한을 두려워해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풀까? 이상히 여겼습니다. 만일 그가 Messiah이든가, Elijah이든가 혹은 선지자라면 세례를 베풀 수도 있었습니다. Isaiah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사52:15)라고 말했습니다. 에스겔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겔36:25) 라고 말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어야 하나? 그들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검증을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왜 세례를 줄까?

바리새인들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받는 세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다른 신앙에서 돌아온 개종자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세례를 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씻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씻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은 단지 이방인들만 받아야 할 세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택받은 백성도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믿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개였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노예 이상 천한 직업을 부과했습니다. 신들메를 푸는 일은 아주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천한 일이어서 제자들로서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오실 그 분의 노예가 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요한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왕은 오시고 있다. 그러므로 왕의 오심을 위하여 너희는 이방인이 정결하게 해야 하는 만큼 정결하게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왕이 역사에 개입하심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다만 그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위대함도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 분의 위대함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말살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알고 있었듯이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이정표였습니다.

Gerald Moore제랄드 무어(1899.7.30.-1987.3.13.)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카나다로 가족이 이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웁니다. 하지만 독주자로는 각광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오르간 연주, 무성영화반주자 등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반주자로 나갑니다. 당대에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를 맡아 연주회와 녹음을 했습니다. 평생 한 번도 독주무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만 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반주가 유명한 성악가들의 노래에 폐를 끼치지 않는지 조심했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피아노소리로 인하여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반주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주회가 1967년2월20일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있었습니다. 이 연주회에서도 무어는 여전히 성악가들의 노래를 돕는 반주자였습니다.

closing 이스라엘이 그대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Messiah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면 그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일까? 자기들이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잘나서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이라도 검증을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Messiah가 왔어도 검증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spotlight는 조명 기구 중 하나입니다. spotlight는 콘서트, 뮤지컬과 같이 특정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비치기 위해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칫 spotlight가 우리를 비취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spotlight는 예수님만 비취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낮은 위치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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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왜곡/교황제도 확립(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어떤 종교든지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고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회가 다른 곳으로 그 힘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때 교회가 성경적이지 못하면 바로 세속화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슬슬 지금 기어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심판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Roma의 영향력은 레오1세(Leo I/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있는 동안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5세기 교황들 가운데 가장 기민한 자였습니다. 5세기중엽에 발생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에 대한 기독론논쟁과 로마제국에 대한 야만인들의 침공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레오1세는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성직임명과 관련된 사계 제일기간, 즉 사순절, 오순절 이후 9월, 강림절에 매년 4번의 단식을 준행하게 한 것도 레오였습니다. 레오의 정치적 수완은 로마의 역대 감독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Damasus 아래 제정된 일련의 법령들을 지속시켰습니다. 마니교의 성찬동참이나 태양신과 기독교를 혼합시키려는 행위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452년에는 로마를 괴롭히는 흉노족인 아틸라에게 찾아가 담판까지 벌렸습니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했을 때는 중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삶에서 핵심적인 문제였던 교리적 문제도 손을 댔습니다. Leo는 서방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서방교회에 기독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감독 지위가 교회에서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지녔던 지위와 동일한 지위”라는 그의 진술은 교황제도의 교리적 토대를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위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나 그가 발휘한 영향력에 있어서 누구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Leo가 성 베드로 성당에 묻힌 최초의 교황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Leo는 베드로와 바울이 Romulus(로마 건국의 시조라고 하는 자)와 Remus(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의 쌍둥이 형제) 대신 로마 수호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Leo의 편지와 칙서에 나타난 문체를 보면 마치 황제가 내리는 조서 같았습니다. 이토록 Leo는 그레고리1세와 니콜라스1세와 함께 역사에서 소위 “대제”(Great)라 불리는 세 명의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래 교황청의 권력과 특권이 그의 방법론, 정책, 이상에 개괄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셀레스틴과 식스투스III세 아래서 420년과 430년대에 로마교회 수석집사 역할을 하면서 Leo는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곧 로마의 감독이 되었고, 440-461까지 21년 동안 서방교회에서 “로마의 교황권을 확립하고 동방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교회법 (Canon Law)을 지지하며, 동방에서 발생한 기독론 논쟁에서 로마교회의 정통적 기독론을 방어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야만인들의 침략 앞에서 로마교회를 다스리는데 진력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Leo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교황제도의 확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Leo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로마교회의 우월성은 서방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Leo는 서방 교회들에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니교, 브리스길라주의(Priscillianism),1 펠라기우스주의(Pellagianism),2 감독의 자질, 재세례 같은 치리적 실제적 문제들 및 야만인들의 침공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Leo가 로마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입니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서 시릴의 후계자였던 디오스코루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권위를 동방 교회들 위에 높이 진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도자인 유티케스(Eutyches)를 동맹자로 두고 있었습니다. 유티케스는 시릴의 교리를 극단으로 끌고 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적절한 자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449년에 기독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으며 사회를 주도한 디오스코루스는 이 회의에서 Leo의 서신낭독을 불허했습니다. Leo의 입장이 이 회의에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 황제 데오도시우스II세가 450년에 죽었습니다. 그의 누이 펄케리아(Pulcheria) 및 그녀와 결혼한 마르시안 장군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펄케리아는 오래 전부터 Leo와 그의 양성 기독론에 동조해 왔었습니다. 정치적 변화는 곧 교회의 논쟁의 변화였습니다. 451년 520명의 감독들이 모인 가운데 칼케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Leo는 로마 감독들이 이전의 동방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전례에 의거하여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 사절단을 대리로 파견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함,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Leo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교부들의 신앙, 사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믿는다. 정통은 그렇게 믿을지어다! 달리 믿는 자에게 저주(Anathema)가 있을지어다! Leo를 통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Leo의 서신이 받아들여져 칼케돈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과 한 본체에 두 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존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레오의 교리가 확정됨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교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습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거룩한 교부들의 판단을 따라 또한 우리가 읽은바 가장 경건한 150감독들의 법규〔콘스탄티노플 회의. 381〕를 따라 우리는 새 로마인 가장 거룩한 도성 콘스탄티노플의 특권에 대하여 같은 것을 작정하고 반포했습니다. 대개 옛 로마의 왕위에 대하여 교부들이 특권을 허락하였던 것은 마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150 감독들은 이 새 로마에 대하여 꼭 같은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로마는 교회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옛 로마와 똑같은 특권을 누려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순위에 있어서 옛 로마의 다음이 될 뿐이었습니다. 칼케돈 회의의 결정은 381년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동등하다는 콘스탄티노플 결정을 재확인 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감독은 로마감독 다음의 영예를 가진다”고 결정한 바가 있습니다. 항상 로마의 우월권을 주창한 Leo는 “28조항의 법규가 325년 니케아에서 가결된 법규와 모순되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위상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Leo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Leo는 “단순한 역사적 이상의 의미로서 자기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 바로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 글 쓰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최소한 그의 말과 그를 듣고 읽는 이들은 이러한 태도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은 성 베드로가 소유했던 모든 것의 합법적 계승자이므로 그가 가진(천국에의) 열쇠의 권한의 정도도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Leo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임직 기념일에 있었던 그의 설교는 마태복음16:16-19, 누가복음 22:31, 요한복음21:15-17을 사용했습니다. 베드로가 감독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람된 주장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의 권위를 로마의 후임 감독들에게 전이하였으므로 로마 교회에는 영구적인 베드로의 권위가 존재한다고 참람된 주장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도 듣지 않고. 사도들의 왕인(?) 복된 베드로를 통하여 지극히 거룩한 로마교회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대한 통치권을 소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Leo는 자신을 베드로와 거의 동일시하였습니다: “Leo는 우리가 베드로의 대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라는 것입니다. 3세기의 감독직에 대한 교리는 모든 감독을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다루었으나, Leo는 감독들의 권위가 어떤 의미에서 자기에게 종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감독들이 교회의 목양에 동참하지만 로마감독의 “충만한 권위”에는 동참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Pope(아버지)이라는 단어는 3세기 이래 주요 교회들의 감독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 로마의 감독에 대한 칭호로 쓰였습니다. Leo에게서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Leo는 비약적인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Leo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로마제국의 두 부분 (교회와 정부) 사이에 어떤 유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로마와 교회를 비교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창설자인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의 쌍둥이 창설자 Romulus와 Remus 같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Leo가 바울을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 관련 본문이 로마의 최고권에 대해 보다 많은 지지기반이 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Leo덕에 로마는 다른 교구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였습니다. 교황제도가 표면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Leo이후 영향력 있는 자는 겔라시우스1세(492-496)였습니다. 겔라시우스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듯이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고 황당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축복받은 베드로의 교구는 다른 어떤 감독들의 결정에 의해 매어진 것이라도 다시 풀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이런 확신 하에 그는 교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교황제도는 역사에서 정착되었습니다.

  1. 4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이단(異端)으로 원래 평신도였던 프리실리아누스는 인스탄티우스(Instantius, 385년 면직) 주교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었고, 살비아누스(Salvianus) 주교에 의해 아빌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온 그노시스주의와 마니교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어 그가 사목을 담당하는 지방에 그의 교리를 폈으며, 황제 막시무스에 의해 체포되어 마술사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였다. 프리실리아누스파는 양태론(樣態論, Modalist)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人性)을 부정하였으며,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유출(流出, emamations)된 존재로 파악하였다. 또 악마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악마에게서 육체가 생겨났고, 죄를 범한 영혼은 벌을 받아 육체와 결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2. Pelagianism: 영국의 금욕적수도사이며, 신학자이고 교사였던 Pelagius로부터 유래한 신학적 견해. 그는 410년을 전후하여 로마에서 신앙생활 지도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아프리카의 히포와 카르타고, 팔레스타인을 전전하며 금욕적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하나님이 남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든지 말든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은총론 및 예정설의 내용을 변질시키고 원죄(原罪)를 부정하는 이른바 펠라기우스설을 주창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 그 무엇 하나도 명령하지 않았고, 또 누구든지 그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육체의 연약성 등을 구실로 우유부단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도덕적 노력을 하도록 분발시키려 했다.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성질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의지는 항상 선과 마찬가지로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서 인간의 성질은 악에 대한 편향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다고 했다.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유아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똑 같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또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내적 은혜의 필요성도, 속죄의 필요성도 모두 부정하였다. 인간의 성질은 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쉽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한다. 이른바 '선택할 수 있는 힘'(possibilitas utriusque patris) 곧 형식적인 자유(인간은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해방되었다는)를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에 가장 강력히 반발한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의 불만으로 논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예루살렘 회의(415년), 디오폴리스 회의(415년)에서 펠라기우스주의가 이단시되었으며, 두 차례 카르타고 회의(417, 418년)에서 정죄 유효선언이 내려졌고, 제2오랑주 회의(529년)에서 다시 정죄되었다.

 

And

어떤 행위는 사회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는다. 그러한 칭찬을 눈앞에 맞이할 때 인간은 먼 곳에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이에게는 유달리 매혹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무지개, 즉 그 상황이 사라져 버리면 그와 동시에 노력하는 힘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도 앞에는 영원히 무지개가 빛을 내고 영원의 상황이 보인다. 기독교도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있어서의 싸움을 갈망한다. 기독교도에게는 늘 싸워야 할 것과 나아가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늘 맑고 밝은 자아의 반성은 스스로의 속에 있는 새로운 결점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점과 싸우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속의 모든 힘은 잠자거나 약해지거나 하지 않게 되어 항상 눈뜨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선하고 싶다는 소원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야심가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퇴화해 가는데 왜 기독교도는 발전해 가는가? 그리고 기독교도들은 앞으로 나감에 따라서 왜 점점 더 깊은 지식을 얻는가? 그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Nikolai Vasil evich Go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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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지사에 관한 좀 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실 겁니다.

성남시에는 전쟁이라 불리는 사건, 즉, 성남시와 대형건설사 간의 소송전이 있었습니다.

 

성남시의 호화청사는 3,200억이나 들여서 성남시를 빚더미에 앉힌 그런 공사였습니다. 물론, 박근혜 정부시절, 이재명 이전의 한나라당 출신 시장이 추진했던 일인데 뇌물수수와 같은 비리도 있었고.... 그런데 성남시청 건설에 참여한 건설사들은 현대건설, 태영건설 등이 있습니다. (태영건설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SBS의 최대주주 입니다.)

 

이재명이 성남시장이 되고나서 성남시는 이 건설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겁니다. 부실공사에 대해 배상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지난한 재판 끝에 건설사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태영건설을 비롯한 대형 건설사들에게 이재명은 공공의 적이 되었지요. "이재명만 아니면 아무 탈없이 잘 해먹었을 텐데 웬 날벼락!" 했겠지요?

 

또 성남시에 대장동이라는 땅이 있었습니다. 판교와 분당신도시, 수지로 둘러쌓인 그러나 보존녹지였던 금싸라기 땅이었습니다. 원래는 대한주택공사가 도시개발사업을 계획했었는데, 2010년 6월 돌연 사업을 포기하고 민간개발로 돌려버립니다.(이 부분을 잘 기억해 두세요. 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막 성남시장이 되었을 그때 입니다. 이재명 시장은 시장이 되자마자 시장권한을 최대로 이용하여 이것을 다시 공공개발로 돌려버립니다. 그래서 무려 5,500억의 이익이 성남시민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2015년에 대장동 도시개발사업 비리수사로 9명이 기소됩니다. 민간시행사 대표는 99억을 횡령해서 지역정치인과 대한주택공사 임원 및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건낸 혐의였습니다.

 

전 대한주택공사 본부장은 공영개발을 포기할 수 있도록 대한주택공사와 정치권에 로비해주는 명목으로 13억 8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또 변호사와 전 해당지역 국회의원 신모 씨의 동생도 같은 명목으로 8억3천과 2억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요.(자유한국당 소속 신모 의원은 국정감사 때 민간에게 개발을 넘기라고 압박을 하였음) 그리고 또 대한주택공사가 공공개발을 포기하고 민간으로 돌리자 감사의 표시로 5,000만원씩 뇌물을 더 줍니다.

 

시행사의 후임대표는 민간개발방식의 사업승인을 받아달라며 전 성남시의회 의장에게 1억여원을 건낸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경기도 생활체육단체 회장, 감정평가사, 전 저축은행지점장 등 줄줄이 엮여서 부정부패가 밝혀지지요. 정계, 재계, 건설사, 언론계가 한통속이 되어 국민의 혈세로 배를 불리는, 소위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이 무섭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재명은 시장이 되자마자 이걸 그냥 공공개발로 바꿔버렸던 것입니다. 저들이 대장동에 땅도 많이 사두고 쏟아부은 뇌물이 얼마인데 저들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뇌물 혐의까지 밝혀져 버렸으니 이재명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리고 이걸 지켜보는 건설사들은 또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재명은 성남시장 시절에 전국 최초로 공공건설의 원가와 세부내역을 공개해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시에서 건설하는 공공건물이나 도로 등이 어떻게 설계됐고 각각의 건축공사나 토목공사, 조경공사 등에 비용이 얼마 드는지 누구나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사내역이 공개되면 민간공사와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공공건설 공사를 할 때 지적되던 부풀리기 설계 여부가 투명하게 밝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재명 시장은 공사내역을 공개하여 부풀려진 건설비를 언론에 공개하고, 시민단체들도 가세하여 정경유착과 불법비리를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니 비리 정치인들과 결탁해온 건설사들은 미쳐버리겠지요?

 

또 박근혜 정부가 공사발주 시 표준품셈으로 산정하도록 정한 정부지침에 대해 제2의 4대강 사업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해버립니다.

실제 시장거래 가격인 표준시장단가로 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공사비용이 훨씬 저렴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당시 계획되있던 공사들만 따져도 무려 50억이 되었는데 이 금액은 전부 공사업자들과 건설사들에게 들어갈 돈이었지요. 그러니 또 미쳐버리겠지요?

 

그리고 아파트도 후분양제를 실시해버립니다. 선분양제, 후분양제가 어떤 차이이고 어떤 의미인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 같아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재명 지사 전임인 남경필 지사 시절에 2,500여억원의 광교 신청사 공사를 '태영건설'이 시행사가 되어 짓게 되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이재명이 경기도지사가 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태영건설은 SBS의 최대주주이지요. 그가 경기도지사가 되자마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재명에 대한 조폭몰이가 시작되었지요. 물론, 전부 무혐의 처분되어서 기소조차 되지 않았지만...

 

이재명에게는 두려움이었겠지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태영건설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대형건설사들과 지방토호세력이 한 사람을 죽이려고 총공세를 한다면 두려워서 무릎을 꿇었을 테지요. 그러나 이재명은 성남에서 이미 지겹도록 겪어봤으니 경기도에서도 공공건설의 원가를 공개하기로 하고 3년 전의 공사까지 모두 공개합니다. 태영건설이 짓고 있던 신청사도 당연히 포함되겠지요? 그래서 전국건설노조 경기도 건설지부는 이 공사현장에서 불법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태영건설을 고발했고 경기도의 특별감사를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재명에게요!

 

바로 얼마 전에도 2017년 태영건설 하청 건설노동자 두 사람이 산재로 사망한 사건으로 고용노동부에 고소당해 1심에서 패소하자, 경기도에서는 태영건설에 올 10월 말부터 3개월 영업정지 행정처분을 내렸고 태영건설은 행정처분의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취소소송을 걸어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소송 중에는 영업할 수 있으니 영업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관계들로 엉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SBS가 이재명을 왜 그렇게 증오했는지 이제 대충 그 밑그림이 그려지겠지요?

 

TV방송은 물론 라디오까지 모두가 아주 이재명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난 것처럼 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OO 판사까지 불러 계속 방송을 했으니까요.

원가공개, 후분양제, 토지거래허가제 등등 전국에서 가장 강한 정책을 펴고 있는 이재명 지사입니다.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여러번 발의가 되기도 했었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계류되거나 국힘당의 전신들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지사의 권한으로 공공건설에만 적용되고 있지만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민간으로 확대되거나(이재명은 계속 정부와 국회에 요구하고 있음) 그가 만약 대통령이라도 된다면, 그들에겐 헬게이트가 열리는 것일 테지요. 수천억, 수조원의 이익이 걸린 문제이고 그래서 더 무섭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진정한 깡다구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공정하게 행정을 추진하고 비리와 부정을 과감하게 척결할 수 있는 결단력과 추진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재명 때문에 이권을 빼앗긴 기득권 카르텔들입니다. 수많은 난관과 협박, 도전이 있었음에도 이재명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지요. 그의 지난 10년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는 항상 이와 같은 살얼음판 위에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그 존재가치가 훨씬 더 커져서 지금 대권경선에까지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득권에 굴복하지 않고 정조 이후에 가장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재명의 이런 깡다구가 우리 정치판에서 소중하게 쓰이기를 바라며, 어떤 위기와 유혹이 오더라도 이재명은 절대 변하지 않고 개혁을 완수해내기를 기원해봅니다.

 

 

이글은 전 경북대 경영학부 김석진 교수가 보낸 자료이며, <이진홍님의 글 옮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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