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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다(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라는 단어는 삼수변에 갈 거자입니다. 모든 이치가 물이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죄악과 사회적인 죄악 그리고 국가전체적인 죄악들이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사회의 근거는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이 이 세상사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죽이려고 쫓아오지만, 그전에 그들이 먼저 당합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대인들을 진멸하려고 했지만(3:12), 정작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하만이었습니다(7:12). 바울사도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면서 환난이나 곤고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나열했던 것들은 당시에 무시무시한 것들입니다. 당시의 무적 Roma의 형벌도구였으며, 이것을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어떤 피조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나열한 것 중 에는 초자연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확고부동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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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까(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Roma에 계속 퍼지고 있었습니다. Roma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속주인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나온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제재를 해야 할 것인가? Roma에는 그 자체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Zeus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Roma사람들은 그 신들이 나라를 세우고 왕성하게 하여 대제국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신들의 도움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Roma에는 얼마나 신들이 많든지, 걸어다니면 발에 걸리는 것들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Roma는 주전 27Augustus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로부터 200년 년간 Roma는 참으로 평안하였습니다. 약간의 충돌이 국경에서 있었을 뿐, 내전도 없었고 경제는 번영했습니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도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은 북아프리카에서 북해까지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영국까지 적용되었습니다. 대제국이었습니다. Roma는 여러 민족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도 원로원에서 선출하지 못했습니다. 군부에서 황제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황제는 명분만 민주공화제였습니다. 실상은 독재였습니다. 황제의 철권정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황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권좌에 오르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도 행여 지진이나 전쟁에서 안 좋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기독교가 있으니까 안 좋은 상황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할때에 막연하게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를 쓰기이전에 이미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을 체험하였습니다. 외적으로 환난을 당하여 내적인 곤고를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왜 이런 못된 것들이 예나지금이나 성도들을 괴롭힙니까?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과 우리사이를 단절시키고자 불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고백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나 내가 잘못할 때는 가차없이 끝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가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예수믿니?’ 그런데 네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예수께서는 아무조치도 취하시지 않지않아? 그러니까 소용이 없는거야.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역경을 바라보며 하나님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꾸 빈정거립니다. 그리고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주님께 매여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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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정죄할까?(로마서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나치정권에서 Auschwitz 수용소 Guard로 근무한 94세의 Groening이 4년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2차세계 대전시, 독일의 Hitler와 일본의 의 군국주의자들의 잔혹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앞으로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우리 인류의 한 치부입니다. 수백만명을 학살한 그들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슬픈 역사의 한장면입니다. 당시 Auschwitz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했었던, 94세의 Groening이 자신이 고백한 죄과에 대한 재판에서 4년 언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독일의 정부와 국민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죄과에 대한 엄격한 법적용으로 공평을 유지 하고져 하는 노력합니다. 이 재판을 받은 독일인은 1921년에 독일의 Lower Saxony에서 출생 했다고 합니다. Hitler가 위세를 떨칠 때, Waffen SS로 불렸던, 청년 유격대에 합류했습니다. 1942년부터 Auschwitz 수용소에서 근무 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감옥에 끌려온 죄수들을 상대로 압수한 현금을 주고 계산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는 느낀바 있어, 당시 그런일을 한것을 후회하고, 공개적으로 Auschwitz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범이기 때문에 4년형의 형기누가 를 언도받았습니다. 사실 94살의 4년형이란 감옥에서 인생을 끝내라는 형벌입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 사람들은 판결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징역형을 살든지, 사형이라든지 등의 형벌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 형벌이 싫으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법정도 무섭습니다. 법이 사회와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과의 완전한 격리의 형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죄는 두려운 것입니다. 정죄 katakrivnw/katakrîno/카타크리노는 ‘유죄 선고하다’입니다. 카타크리노는 Herodotus이래 ‘~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을 의미했습니다. 카타크리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천벌이나 파멸을 말합니다. 인간의 재판에서는 이 단어가 형의 집행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판결만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형집행과 판결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6:16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곳을 재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영원한 정죄는 어느누구도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전혀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죽어서 땅에 묻혔던 사람을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 사람의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예외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정죄할 수 있습니다. ‘누가’tiv"/tîs는 의문대명사(疑問代名詞)입니다. 부정대명사(不定代名詞)입니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할 수 있을까? 하고서 예수그ㄹ스도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심판석에 앉으심을 말했습니다. 이사야53:12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사도의 논증으로는 우리들을 정죄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자녀로 이미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nd

시온에 있는 돌/반석(로마서 9:32-33)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자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무엇을 해도 옳다고 생각하며 바르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18세기의 마지막 몇 해에 끝난 계몽주의 시대는 르네상스의 기초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적사고와는 궁극적으로 달랐습니다. 인간을 근본적인 사상의 변화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사상은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지위를 격상시키면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간이해라는 것은 인간을 뜯어보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인간을 높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나 현대나 인간을 높이는 것은 대동소이합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인간이 주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돌에 부딪힙니다.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행위라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죄인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즉 더러운 옷을 입고서 깨끗한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위라고 해봐야 별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선하게 보이는?)를 사람들은 무척이나 좋게 보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실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귀하게 여깁니다. 종교의 가치, 각종 행위의 가치가 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부딪힐 돌에 부딪혀버립니다. ‘부딪힐’ /proskovmmato"/“프로스콤마토스”은 ‘걸려 넘어짐’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은 철썩 같이 믿었는데 전혀 엉뚱한 결과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한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진 이유는 그리스도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 즉 행위를 의지하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그리스도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굳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 적부터 쭉 믿어온 믿을만한 전통이 있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문제는 깨끗이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확신했고, 철저하게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넘어지는 돌이었습니다. 고금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피하여야 했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파멸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6:12-17을 보면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산이나 언덕이 매몰되면 바로 죽습니다. 그런데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습니다. 그리고 산들과 바위에게 말합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말합니다.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산과 바위가 무너져서 자신들을 덮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종교간 대화? 종교다원화?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사야28:16과 이사야8:14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의 파멸을 입증했습니다.

 

이사야28:16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다

이사야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될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결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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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위(로마서 9:30-33)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주석을 달고 해석하여 정확하게 율법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 율법이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율법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개라도 더 율법을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서 자신들의 창고에 잔고가 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들의 잔고를 늘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절대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대변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사항이었습니다. 누가복음18:9-14절을 보면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은 하나님께 의로움을 쌓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토색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간음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나쁜 세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립니다. 즉 바리새인의 요지는 지킬 것 철저하게 지키고, 해야 할 사항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만 가슴을 칠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잘못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순전히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사람의 행위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인간이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全的腐敗전적부패란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나올 때 그의 자연적 상태에 있어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질과 성격에서 전부 오염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부분 지성, 의지, 감성, 감정, 양심 몸 등이 죄로 전부 감염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지고,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행동하는 의지는 어두운 지성과 반동적인 마음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가슴은 오염되었고, 감성은 왜곡되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악하고 불경건한 것에 자연히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양심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이같이 진술하고 있는 구절들로 가득합니다.

창세기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사

창세기8:21 여호와께서 그 중심에 이르시되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열왕기상8:46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고 솔로몬이 선포하였다.

시편14:1-3 어리석은 자(히브리어 나발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51:5 다윗이 선언한 바에 의하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편130: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143:2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전도서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도서9:3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이사야53:6 우리는 다(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이사야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예레미야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능히 알리요

누가복음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요한복음5:42 다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로마서1:29-32(참고.1:18-28)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사람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지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3:9-2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이어서 온 인류를 열 네 항목으로 기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만 빼고 시편에서 인용)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계속적으로) 이르지 못하더니

갈라디아서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세상)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의 지배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그렇게 주장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성경과 다투는 것이다.

에베소서2:1-3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좋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4:17-19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요한11: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15:19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성경은 이토록 타락한 인류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대도 일부 사람들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구원에 대한 생각을 달리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전적부패란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정말 사악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몇 가지 보통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생득적인 신의식(1:20-21,32),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들(2:15) 그리고 세속정부(13:1-5)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악하게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방하고 억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전적부패는 모든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아 그들의 본성의 모든 부분과 능력과 기능에 있어서 그들의 존재의 전체를 통해서 즉 전면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정신적 결과와 관련해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후손이 짐승처럼 비이성적인 상태(즉 사고의 무능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보통 은혜 때문에(1:9), 타락한 사람들이 논리적인 사고(생각)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정말로 짐승 같은 비이성적 존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친 죄의 결괴들 때문에 보통 은혜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과학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짓, 부지중의 과오,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 발생하는 실수들, 자기 망상과 기만, 환상적 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부정적 영향,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신체적 연약성, 파괴된 인간관계, 부정확한 정보의 결과, 죄악 된 이기주의, 정신력의 약화, 내면적 혼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적 기점으로부터의 그들의 일탈 등입니다. 이 모든 죄의 결과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들이 지식을 추구할 때 부지중에 무지에 빠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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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자카리 테일러(Tachary Taylor)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헌법에 의해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테일러 장군은 그 날의 취임을 거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국가적인 행사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설득하고 간청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헌법은 임기가 만료된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폭스 폴크가 대통령직에 하루 더 머물러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동안 국가원수의 자리에 공백이 생겼습니다. 하는 수없이 테일러가 취임을 거부한 그 주일 3월4일 12시부터 월요일 12까지 24시간 동안 자리를 메울 임시 대통령을 상원에서 선출해야 했습니다. 상원은 상원 의장인 데이비드 R.애치슨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애치슨은 그로서의 금도를 발휘하였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깨우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해 놓고 토요일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대통령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인위적인 법률보다 위에 있음을 믿고 주일날 취임을 거부한 대통령이나 24시간 국가 원수의 직위를 위임받고도 의도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아니한 임시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의 신앙과 도의심과 절제력과 준법정신을 극명하게 대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국은 세계 최의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테일러는 1849년 3월5일 취임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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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닳지 않는 영원한 보물이다. 이사야 64:5에서 우리는 주께서 자비로 영원토록 선대하시나니라는 말을 보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영원토록 나를 자비롭게 대하신다면아무리 곤고한 영혼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금까지 용서하셨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다시 범죄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더 베푸시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영원토록 그 선하심과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그래서 시편136편은 그 영원함을 한 번이 아니라 무려 26번이나 계속해서 찬미하고 있다.

Thomas Goodwin

 

れみは永遠ですそれはしてえず摩耗しない永遠宝物ですイザヤ645たちはれみで永遠ばれるかという言葉ますもし永遠にわたしを慈悲深われるならばいくら困難であっても、「わたしは満足ですという告白をささげるでしょうはあなたをこれまでされましたかしか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あなたは犯罪しましたか自分れみをもっとえてくださいますかそうだ永遠永遠そのげられるでしょうだから詩編136その永遠さを一度ではなくなんと26けて賛美してい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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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mma of the Paulos(로마서 9:27-29)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난해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더러 있습니다. 창세기14:18의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등장하여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 멜기세덱이 시편110:4에 또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여호와의 변치않는 맹세를 말하면서 멜기세덱의 반차/hr;b]DI/서열를 좇았다고 합니다. 또한 히브리서5:11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소돔사람을 구출한 후에 소돔에서 만난 멜기세덱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멜기세덱을 추정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신비의 인물로 묘사하며 제사장과 변치 않음에 대한 인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사실상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비판을 하며, 비난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변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증이 그리 쉽지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런 논쟁과 반론을 항변합니다.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그들 전체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선별과 선택과정이 계속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형제중에서 아브라함을,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 이삭을,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을. 이런 선택의 과정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 선택된 사람들이 어떤 공로가 있는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 외에는 어떤 것에도 달려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공평하고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dilemma이고 우리들의 dilemma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독단적인 선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 정책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인가? 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의 대답은 한 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시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합니다. 첫 번째로 출애굽기33:19을 예로 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어떤 증거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자신이 택하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민족의 선택과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태도도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즉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애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강대국에 자국의 안전을 맡기려고 안달입니다. 누구도 Donald Trump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 당선이 되니까 세계각국에서 난리법석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국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무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굽과 바로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전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전쟁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바로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에게 가서 놓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바로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또 그 능력을 거역하는 자에게 그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바로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한 예로써 역사 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9-16/William Barclay). 우리 생각은 여기에서 dilemma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사실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 성격에 위배되는 일을 아무것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 오늘은 지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시키다가 한 달 후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자전시키지 못하십니다. 굳이 하시려고 하시면 능히 하실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불공정한데 대해서 또 사실상 자신의 법을 어기게 되는 여하한 행위에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책임하게 한 사람에게는 자비로 베풀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으시며, 어떤 왕을 그저 꼭두각시가 되거나 어떤 인물을 그를 통해 하나님의 보복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하나님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논리의 基底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공의라는 조건하에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아무 권리도 주장 못합니다. 언제든지 공의가 들어오면 그 대답은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논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주장이 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비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선별이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비난의 칼을 빼듭니다. 만약에 전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배척한 사람을 나무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잘못은 전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잘못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야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경건치 않은 후손)과 셋의 후손(경건한 후손)들의 연합으로 인하여 세상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즉시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120년 후에 물로 세상을 쓸어버린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을 바로 앞에 두고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24:38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된다고 하는데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혼인식을 계속했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경고했는데,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말이 그렇지 120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은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시지 못하다고 비방합니다. 유치한 반론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의 대답은 퉁명스럽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누구도 하나님과 논쟁할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그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대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꽃병이 되고 싶은데, 왜 물그릇을 만드느냐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그것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덩어리의 진흙에서 한·그릇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한 목적을 위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흙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반항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말을 예레미야에서 인용했습니다(18:1-6).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에 대하여서 William Barclay는 바울사도가 이 말했을 때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 귀절을 기록한 것은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 바울 자신의 골육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왜 못 박았냐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난처한 사실입니다. 로마인들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든지 배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것도 골육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의 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백성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바울은 그 논쟁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이 유대인의 배척은 이 방인에게 문호가 개방되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는 dilemma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환경을 사용하여 거기서 선한 것을 끄집어냈다고 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악한 환경을 칭-조하여 거기서 선한 것을 끄집어냈다고 말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나오게 하기 위해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의식적으로 이방인이 들어올 길이 열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굳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의 논리는 dilemma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어떤 타당성 있는 이유를 찾기에 그 마음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의 변론입니다. 결국에 가서 바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답은 그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바울은 유대인들과 논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논증을 방어하려면 그들 자신의 성경의 인용문으로 보강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유대인의 배척과 이방인 측의 받아들임이 이미 선지자들에게서 예언되었다는 본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23).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0). 그는 어떻게 이사야가 이스라엘이 남아있는 자들이 없었더라면 전멸되었을 환경을 미리 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10:22-23, 13:10). 이스라엘은 그 백성이 이해만 했더라면 그들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조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자기 백성에 대한 절망적인 번뇌 속에서 어찌해서인지는 모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이라는 사실에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10:17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윤리적 거룩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 영원 불변하신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의롭다qyDIx'/‘차디크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힘입니다. 사람을 일단 외모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란 사람을 지지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과거에 CEO였으니까, 잘할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또 속였습니다. 그리하여 4대강을 死大江으로 파괴해버렸습니다. 해놓고보니 빠른 시기에 파괴해야만 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나쁜 대통령이었습니다. 외모라는 것은 이만큼 사람들을 심히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들의 행위와 관련해 항상 같으시되, 의로운 자들은 항상 용서해 주시고 죄 있는 자들은 항상 정죄하십니다(23:7). 모든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길과 판단에 있어서 항상 의로우십니다(18:25). 모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여호와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행하심)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그릇 행함이 없이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32:2).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재판관은 그들 위에 있는 법에 충실하면 의로운 재판관인데 반하여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경우는 그의 사법적 결정을 내리는 표준이 되는 자기 위에 있는 율법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의 표준은 그 자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진리입니다. 따라서 피조물 된 자들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판단하실까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 그리고 진리 및 윤리적 거룩하심에 근거하고 있어서 공평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그 자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본성의 표준에 따라서 되어집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에 보복적일 뿐 아니라 보상적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복적으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시편7:11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편9:7-8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시편96:10-13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이사야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다니엘9:14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니

로마서2:5-6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도다

로마서2:5-6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데살로니가후서1:5-7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의 공의를 보복적인 것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지만, Herman Bavinck가 지적한 대로,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원리로 일반적으로 제시되어 있는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나님이 의로운 자들을 의롭다 하시어 그들을 높여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는 속성으로서그 의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를 대망하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는 의로운 가지요(23:5), 의로우시며(9:9),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고 공의로 하시며(11:3-5), 따라서 그의 심판은 이러할 것이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72:12-14). 그런 까닭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는 특별히 궁핍한 자들을 건지시는 가운데 나타납니다. 궁핍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긍휼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세우신 까닭입니다(7:9). 또한 도우시고(31:1), 응답하시며(65:5;143:1), 건지시고(143:11), 소성케 하시며(119:40), 죄를 용서하시고(34:22), 그들에게 합당하게 공의대로 행하십니다(35:23).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진노와는 달리 그의 인자하심과 대립되지 않습니다(69:24).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나타내실 때 동시에 그의 은혜를 보이십니다. 죄 용서마저도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그 의의 계시는 구속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입니다. 어떻게 온 세계의 의로운 재판장이 죄인들에 대하여 공의로 용서하고 공의를 베푸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의함으로 정죄를 당하지만, 그들은 의로운 대의를 얻으며 여호와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공의를 베푸실 것과, 그들의 싸움을 싸워 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승리를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별히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죄 용서를 허락하시고, 그들의 심령에 성령을 부어주시며,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 판에 새기시며, 이로써 하나님 면전에서 온전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죄인일지라도 오직 여호와만이 그들을 이 죄에서 건져주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는 대로는 여호와는 자기의 언약에 충실하심으로 의로우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45:25),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그들에게 가깝게 함으로 구원이 지체되지 않게 하십니다.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 의의 원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약의 계시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허락하실 수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택된 자들의) 전에 범한 죄들을 간과하신(용서하신)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이 현세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될 수 있게 합니다.

통상 다음의 성경구절(구약/3, 신약/1)을 하나님께서 엄정한 공의로 사람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개념을 반대하여 흔히 인용되었습니다.

이사야40:2 너희는 정다이(부드럽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힘든)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yIl'p]K/i키플라임)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예레미야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hnEv]mi/미쉬네) 갚을 것은

예레미야17:18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hnEv]mi/미쉬네)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요한계시록18:6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dipla'/플라) 갚아 주고 그의 섞는 잔에도 갑절이나(diplou'n/디플룬) 섞어 그에게 주라

고 했습니다. 위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에 대하여 갑절의 위험을 행할 수 있고 또 행하신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달란트 무게의 죄에 대하여 두 달란트 무게의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불균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분명한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성경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 Kline은 이 구절들에서 ”(또는 갑절”)로 번역된 히브라어와 헬라어 단어들은 여기에서는 사실 대응하는또는 맞먹는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를 부인하는 대신에,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엄정한 공의를 따라 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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