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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과 이쪽을 연결한 사람(창세기9:28-29)

히브리서 11:7절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을 노아는 한 것입니다. 노아는 심판 저쪽 사람들과 심판 이쪽 사람들을 연결한 사람입니다. 유일하게 물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노아는 Matthew Henry의 말대로 아담보다는 20년을 더 살았고, 므두셀라보다는 19년을 적게 산 950년을 살았습니다. 노아는 장수(長壽)한 전 세상과 점점 단명(短命)한 이 세상을 잇기도 한 사람입니다. 점점 사람들의 수명이 줄어들어(셈600; 11:10), 데라는 205세까지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전도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습니다. 무려 120년이나 사람들에게 외치고 그의 표징을 보여주었지만 한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홍수 후에도 죄가 점점 관영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죄란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 자라가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죄가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죄와 사람이 병행하고 있습니다. 죄는 먹는 것, 입는 것, 자고 쉬는 것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항상 묻어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교제가 파괴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불결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인간과 멀어졌고,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 추방당하고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되는데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문제입니다. 자신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자들이 남을 구원한다고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가지고서 해결해 보겠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무에서 떨어지는 즉시 이미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항상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라는 벌레가, 죄라는 폭풍우가 항상 가지를 흔듭니다. 줄기에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잡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의 말씀대로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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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세 아들(창세기9:22-27)

셈과 야벳은 노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함, 특별히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받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녀의 장래에 부모의 행위가 상당히 영향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직접적인 죄는 함이 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 질문할 수 있습니다.

Thompson은 함의 미래가 가나안의 미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Open성경은 가나안 족속의 타락한 성격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했습니다(수9:23, 삿1:30, 대하8:7-8).

Matthew Henry와 송병현은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조상이 이미 오래전에 저주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 정복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한 듯하다고 했습니다.

Calvin은 그 형벌이 그것의 가혹성을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려고 그의 후손에게까지 옮겨진 것이라 하였습니다.

Keil과 Delitzsch는 가나안이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함과 죄악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거나 노아가 가나안의 이름에 중요한 징조를 깨달았다 했습니다.

Walter Brueggemann은 부모의 권위와 비밀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어떤 특정한 성적인 문제를 반영한 저주라고 했습니다.

손석태 교수는 함을 저주하지 않고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노아의 실수로 인하여 함이 저주를 받아 가나안이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함의 불경함과 셈과 야벳의 세심한 배려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과 주해를 참고하면 죄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악한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태도에서 심사숙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폭로하는 데는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하나는 죄를 폭로함으로써 선을 이루고자 할 때이며, 슬픔과 수치를 무릅쓰고 행합니다. 다른 하나는 단지 즐기고 웃음거리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죄를 지적하면서도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실수와 죄에 대하여 들었을 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charity)은 우리에게 최고 중요한 덕성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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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죄(창세기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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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가 취하였다. 그리고 그가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였습니다. 노아가 술 때문에 자기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을 잤습니다. 홍수이전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만취한 것은 그가 주의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자 노아는 자기 자신을 벗어서 노출시켰습니다. 큰 실수를 범한 자는 어리지 않았습니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옛날 전 세계와 홀로 대항했던 노련한 노아였습니다. 이제 상대적 안전의 순간에 그는 범죄 했습니다. 노아처럼 온전히 선한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노아는 한 결 같이 양심과 신앙의 원리를 따라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 취하여 장막 바닥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그 땅은 노아가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잘못 이용하여 그의 후손들의 생활양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노아에게는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의 포도원에서 나는 포도주를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것입니다. 노아의 죄는 우리에게 죄와 관련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①보다 작은 유혹이 때때로 가장 효과적인 유혹입니다. 전쟁터에서는 무적의 용장입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자객의 손에 쉽게 죽임을 당합니다. 홍수 전 노아는 자기를 반대한 온 세상의 조롱과 폭력도 혼자 힘으로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홍수전의 노아의 상황은 외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내부에서 오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강했던 사람들이 내부적인 것으로 힘없이 무너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② 사람들이 황금기에, 심지어 노년기에 유혹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죄도 우리를 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태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많은 악의 샘이 어떻게 열려져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악의 샘은 아주 미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좀먹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항상 경성해야 합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 주님께서 이 명령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명심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홍수가 지나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아담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John Murray는 죄는 아담에게만 아니라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했습니다. 인류라는 유기적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공동체적 부패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노아는 술에 취했던 것입니다.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노아가 넘어졌다면 누구도 인간으로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설교자도, 교사도, 도덕적인 크리스천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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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의 아비 함(창세기9:18,19)

성경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성경은 이들로 말미암아 인류가 퍼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아니면 지구상에 인류가 퍼질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ve)은 “이름, 명성”이란 뜻이며 장자이고, 함(!j);은 “뜨거운”이란뜻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 아들입니다. 야벳(tp,y<)은 “넓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 아들입니다.

18절을 보면 가나안은 노아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미리 함의 아들로 먼저 나옵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되든지 나쁜 인물이든지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불행히도 저주를 받은 인물로 나타납니다. 죄란 이렇게 적은 무리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저주 받은 자가 나왔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열두 지파 중에서도 나왔습니다. 죄는 이렇게 끊임없이 인류사(人類史)에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존 머레이는

죄는 오염과 죄책을 수반한다. 오염이란 성품과 성격의 타락을 가리킨다. 사람은 전적으로 거룩하지 못하다. 그의 모든 기능들과 행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함이 없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요구하는 완전성에 미치지 못한다. 사람의 이해력은 어두워졌다. 그 의지는 노예화 되었다. 그 양심은 왜곡되었다. 그 性情은 타락되었고 그 마음은 부패하였다. 그 뜻은 하나님에 대한 적의로 변했다.

고 하였습니다. 홍수 후에 얼마 있다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실수를 합니다. 얼마 전에 의인이라고 했던 사람이 실수를 합니다. 그로 인해서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다. 죄는 사람을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사람을 괴롭힙니다. 어떻게든지 우리들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를 해결하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사람들을 살립니다. 이 아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수없이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 아들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서 구약에 모든 성도와 신약의 모든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이 땅에 살려두시는 목적은 예수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죄는 에덴에서 쫓아내도 없어지지 않고 홍수로 쓸어도 죄는 남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만 이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허를 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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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언약(창세기9:8-17)

홍수 후에 사람들은 하늘에 먹구름만 끼어도 놀랐을 것입니다. 또 ‘대홍수가 오려나 보다’라고 염려를 했을 것입니다. 빗방울이 조금만 떨어져도 대홍수 때문에 놀랐을 것입니다. Keil과 Delitzsch는 가견적인 표식으로써 모든 세대들을 위하여 언약을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과 그들과 함께한 생물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하셨습니다. 그 언약을 ‘영세까지 세우겠다’하셨습니다. 그 표로 무지개를 하늘에 놓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계약종교이며, 기독교적 믿음의 순종은 계약적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yriB](언약, 계약, 협정)는 ‘계약을 자른다’(tyriB] tr'K;)입니다. 그래서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입니다. 노아의 계약은 보존의 계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은 종말의 때까지 지구를 현재의 세계 질서대로 보존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지구를 다시는 저주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그 이유를 다음에 기록된 말로 제한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뭉뚱그려서 노아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지 않고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일이 말씀하십니다(10). 무지개라는 뜻은 ‘활’을 뜻합니다. 화살을 장전하여 쏘는 사냥군과 전사의 활을 의미합니다. 활은 고대 근동의 상용무기였습니다. 고대인들은 무지개를 번개 같은 화살을 장전한 신적 전사의 무기(활)로 생각하였습니다(시 7:12-13; 합 3:9-11). 하늘에 이 활을 걸어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졌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평화롭게 자기의 활을 걸어두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아에게 위안을 주는 약속이며, 세 가지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1)땅이 있는 동안에는 매년의 계절이 계속될 것이다(8:22). (2)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아니할 것이다(9:15). (3)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표시로서 무지개를 비온 후에 구름 속에 나타낼 것이다.’ 이 언약은 후기 언약들(17장; 출 24장)과는 다릅니다. 노아와 언약은 그 범위가 전 세계적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6:10; 9:18-19)이 모든 민족(10장)의 조상들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또한 새와 동물을 포함하는 모든 생물(9:10, 12, 15)과 땅 자체(9:13)와 언약이기 때문에 생태학적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주제는 인간의 생명입니다. 그 주요한 과제는 생명의 존엄성(혹은 신성함)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가 생각할만 하였습니다. 고대 세계는 폭력이 성행하였습니다. 라멕은 칼로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주안점은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일관성과 그리고 인간사회의 법률의 필요를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는 법을 가지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첫 과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결정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지구의 질서와 해의 계절이 지금까지 유지되었습니다. 무지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로, 당연히 그대로 되는 자연적 현상을 두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 언약이 노아에게는 물론, 우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언약입니다. 그것은 계절이 기대한대로 오는 것 같이, 비온 후에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와 같이 반드시 그대로 되어지며 이것을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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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후에 주신 하나님의 복(창세기9:2-7)

1절과 7절에 생육하고(WrP]) 번성하여(Wbr]W) 땅에($r<a;h;) 충만하라(Wal]miW) 하셨습니다. 모두 다 명령형입니다. 이 명령은 아담에게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창 1:28). 창조 후에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이제 새로운 조상 노아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대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당대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계속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모든 지구의 모든 생물이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우상을 섬기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때와 다른 또 하나가 있는데 이제부터는 고기를 식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 노아 이전에 고기를 식용하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카일과 델리취도 사람이 그때 처음으로 육식을 시작했다고 확증하지 않으며, 아마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전에 행하던 일을 처음으로 인정하셨거나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되 피채는 먹지 말라하셨습니다. 역시 Calvin은 피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적인 영이 주로 피에 거하고 있는 한 우리의 감정에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 피가 생명을 상징하는 표라고 했습니다. 피는 영혼의 좌소나 생의 원리로 간주하였습니다. 때로는 피가 영혼 그 자체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식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성경전체에 그러한 정신이 비추어졌습니다. 짐승의 생명에 대한 존귀성을 보여서 인간 생명의 존귀성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증가에 대한 대비를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결혼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결혼법은 에덴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인데 다시금 확인하셨습니다. 이전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결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호하기 위한 대비를 하셨습니다. 짐승세계에 대한 대비를 하셨습니다. 에덴에서는 짐승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 없었습니다. 짐승들이나 하등 생물들이 인간들에게 반항이 없었습니다. 관용과 사랑으로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이러한 관계가 불완전하였습니다. 세상의 도덕질서가 문란하게 되자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짐승들이 인간들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세계에 대한 대비를 하셨습니다. 홍수전에는 살인행위가 공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종한 상태가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질서를 확립시켰습니다. 살인자에게는 입법조치가 강구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률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넘어서서 현재까지 살아있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고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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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9:1)

9:1절은 1:28절의 표현과 정확히 동일합니다. 최초의 인간에게 복 주신 하나님은 이제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복 주심으로 땅위에서 새로운 삶의 장을 여셨습니다.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복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노아가 이 말씀을 받을 때는 물로 전 세상을 쓸어버린 때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에 잠긴 일 년이나 잠겨 있었기 때문에 땅은 황량한 그 자체였습니다. 어찌 보면 두렵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와 가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언약 tyriB](계약, 협정)을 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약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수없이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생육할 수 있도록 땅을 새롭게 조성하실 것입니다. 번성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십니다. 땅에 충만하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언약을 받은 자들은 복된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이전에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이들이 이제 세상에서 편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땅에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즉 누구도 그의 약속을 변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전과 같이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cavri"; grace)는 그냥 받는 선물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공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즉 노아는 홍수 속에서도 살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너희가 알아서 잘 살아라”가 아닙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함께 하심은 나의 모든 지략과 지혜를 배제하는 것은 또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는 일 년 전으로 축복의 면에서는 다시 돌려놓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노아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처럼 우리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까닭 없이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반드시 받아야 하는 복이기도 하지만 아무나 받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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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창세기8:20-22)

노아는 여호와께 단을 쌓았습니다. 단 j'Bez]mi(미즈베아흐)은 jb'z:[희생제물로 도살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희생제사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그들이 땅 위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를 위한 기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사 제사는 우리 생애의 각 시기를 끝맺는 적당한 행위입니다. 새로운 시기의 시작을 하는 적당한 행위입니다. 노아는 다른 일을 생각하기 전에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행위에 감사의 황금가락지를 끼우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과거는 신성하게 됩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획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합당한 표현입니다. 그는 우리의 제사를 기뻐하시며 우리의 진실로 감사하는 사랑은 향기를 내는 향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희생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예배)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 세겜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예배했습니다(창 12:7-8). 족장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축복을 기념하려고 각각 브엘세바와 벧엘에 단을 쌓았습니다(창 26:25, 창 35:7).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모리아산 제단에 눕게 되었으나, 그의 자리는 수양이 대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배려로 땅에 어떠한 저주도 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음을 아셨기 때문에 전 인류를 멸망할 홍수나 심판을 땅이 있을 때까지 내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지적인 심판까지 거두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도 대심판때까지 보류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려고 하면한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고부동한 언약을 하십니다. 그 언약으로 그의 은혜로우심을 신실하게 계속 나타내십니다. 다른 종교같이 풀어서나, 꿈으로나 주시는 언약이 아닙니다. 순수한 인간의 말로 언약을 주십니다. “노아와의 언약은 일반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홍수로서 모든 육체를 다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언약을 붙잡으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우리로 이어지는 그 언약을 붙잡으면 됩니다. 그 언약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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