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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울(사도행전28:30-31)
바울만큼 성경에서 많은 정보와 많은 면을 보여준 인물도 드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히 박해했던 자가 dramatic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개종하여 이방에 하나님의 전도자가 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누구보다 유망했던 사람인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인물도 역시 바울사도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쓴 사도바울, 그에 대해서 쓰려면 아마도 시간과 지면과 자료출처가 너무 많아 제약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썼습니다. 그는 사울/Sau'lo"/Saȗlos이라는 히브리 본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박해자였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에 열렬히 지지했던 것으로부터 최대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사형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울이 유대교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항상 살기등등하다고 했습니다(행9:1).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을 이단이자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개종자들을 많이 체포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성도들을 잡으려고 체포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즉시 U-tern을 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증오하던 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사막에 들어갔습니다. 삼년 후에 모습을 드러낸 바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핍박했던 열심히 이제는 섬기는 열심히 변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를 위험스러운 배반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바울을 암살이나 모살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개종한 바울사도는 로마제국의 동부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J. Stenphen Lang 2007, 150).
바울사도는 길리기아의 다소출생이었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롬11:1, 빌3:5). 왜 베냐민 지파를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끌고나가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학교에서 배웠습니다(행22:3). 로마시민권을 소유했습니다(행16:37, 22:25-28). 천막제조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18:1,3).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갈1:14, 빌3:5, 행9:18,19). 유대인으로 있을 때 바리새파였습니다(행23:6, 26:5, 빌3:5,6).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고전9:5).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행9:15,16, 22:13-18, 롬1:1, 고전1:1,9:1,2,15:9, 갈1:15,16, 엡1:1, 골1:1, 딤전1:1,2:7, 딤후1:1,11, 딛1:1,3).
바울사도는 온유했습니다(딤후4:16). 양심이 깨끗했습니다(고후1:12, 6:3). 사려가 깊었습니다(빌2:25,26, 몬1:8-14). 그러면서도 담대한 사도였습니다(행9:29, 엡6:20, 살전2:2). 결단성이 있었습니다(행20:22-24, 21:4,5, 10,11).
사도행전의 끝 부분에서 바울사도는 가택 연금된 상태로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풀려난 뒤 로마제국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폭군 네로의 박해 때 네로의 후궁들을 개종시키려 했다가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쓴 바울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사도들은 여러 계층에서 부름을 받아 여러 상황에 맞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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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격려하시는 하나님(사도행전28:11-15)
바울일행은 10월 하순경에 멜리데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더는 항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배다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풍과 바람이 거세게 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겨울을 할 수 없이 멜리데섬에서 나야 했습니다. 다음해인 61년 2월 이른 봄에 Roma로 떠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서풍이 불어서 Roma로 항해하기가 멜리데섬에서 다른 배가 겨울을 났는데 그 배는 알렉산드리아의 배였습니다. 배의 이름은 디오스구로였습니다. 곡물상선단 배로 추정합니다. 당시에는 Roma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Roma의 군인들은 어떤 배라도 탈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에서 출발한 배는 Sicily의 동쪽 해안의 큰 항구인 수라구사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서 사흘을 멈추었습니다. 수라구사는 고린도의 식민지로 주전734년에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212년에 Roma의 지배지였습니다.
수라구사에서 바람부는 쪽으로 배를 돌려 ltaly 남단에 있는 레기온(Reggiodi Calabria)으로 향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Napoli만에 있는 보디올에 도착했습니다. 보디올에서 비로소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성도들의 청함을 받아 일주일을 함께 있다가 Roma로 향했습니다(14절).
Roma에 도착하자 바울의 소식을 듣고서 압비오 거리와 삼관까지 성도들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피아 로는 남부 Itaiy에서 Roma로 가는 큰 길이었습니다. 바울일행이 Roma에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성도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바울사도를 Roma까지 데리고 가려했습니다. ‘맞으러 오니’ eij" ajpavnthsin에서 ajpavnthsi"는 귀한 방문자를 성읍전체가 환영하거나 또는 새 통치자가 그 수도에 승리의 입성을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성읍의 대표단이 나가서 고위층의 방문을 영접하고 그 남은 거리를 호위하는 공식적인 환영을 의미하는 전문용어입니다. 따라서 형제들이 바울을 극진히 환영한 것을 말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Roma로부터 55km나 떨어진 삼관까지 마중나왔습니다. 삼관은 삼여관(Three Tarerns)으로서 로마와 압비오 시장 사이 압비오 도상에 있는 여인숙 또는 휴게소입니다. 어떤 성도는 삼관에서 16km나 더 걸어와서 바울사도를 영접했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당시에 세금쟁이들과 뱃사람들로 붐벼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Roma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행23:11). 그리고 땅 끝까지(당시에 서반아)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Roma에서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대접을 받을 지 몰랐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우리의 염려를 일순간에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모든 성도에게입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 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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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문가인가? (사도행전27:9-11)
사람들은 흔히 전문가(professional)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전문가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전문가인지, 어떤 사람이 비전문가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도 전문가, 저 사람도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묘사한 바울의 항해와 난파의 기록은 생생하게 고전적인 필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하게 파선에 대한 기록만이 아닙니다. 본문은 “고대 항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매우 시사적인 문서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9-11절을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로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호송책임자는 역시 Roma의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리오도 Roma로 가는 길에 바울사도가 성도들에게 대접받음을 허락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3절). 바울일행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항해하였습니다(4절). 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 지방의 지중해 연안지방에서는 여름에 서쪽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습니다. 이 바람을 맞으면 항해가 곤란했기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면을 타고 항해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순조롭게 소아시아의 한 동쪽지점에 도착해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무라는 애굽과 로마사이를 왕래하는 곡물선단의 주요항구입니다. 거기에서 율리오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 곡물선단은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Ramsay는 ‘그 배는 정규항로로 운행하여 아마도 빨리 Roma로 가기위해 빨리 달렸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을에는 바람의 방향이 북풍으로 바뀔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항해하기가 점점 어려웠습니다. 7절을 보면 무라에서부터는 강한 북서풍이 불어와서 천천히 그리고 어려운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도에 도착한 배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니도항은 애굽으로부터의 상선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백부장은 니도항에서 알렉산드리아호에 올라타고서 순항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통 금식하는 절기는 9-10월 10경이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9월 중순경이후에는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11월11일 이후에는 아예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여행을 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기에 백부장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위험한 일을 결국 자초한 것입니다. 소위말해서 자격들을 많이 따지는데, 자격이 꼭 능사는 아닙니다.
바울의 출생과 배경(사도행전22:2-4)
22:2-21은 3-4절은 바울의 출생과 배경, 5-16절은 바울의 회심, 17-21절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변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타국인이 우리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한다면 아마도 말할 동안에는 조용히 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죽이려 했던 폭도들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사도의 말을 일단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Kilikiiva/Killikiîa ‘다소’tarsov"/tarsôs 출신이었습니다.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역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입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소는 유속이 빠른 키드누스 강변의 도시입니다. 지중해에서 16km, 타우루스 산맥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다소는 소아시아의 산맥의 녹은 눈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강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수면 위로 21m되는 지점에 위치한 이 도시 아래에 항구호수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중해 선박이 접근하기 용이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이 독특한 수로 때문에 다소 내륙은 해상 무역이 번창하였습니다.
주전41년에 이 내륙 호수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 장소입니다. 유브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무역로가 안디옥 및 다소에서 동쪽으로 80km 되는 동지중해의 대로와 결합하여 길리기아 중앙을 통과하여 북으로 돌아 다소산맥을 통과 소아시아의 고지에 이릅니다. 다소인들과 그 이웃들은 주전1,000년에 이 고지대로 가는 자연상태의 협소한 통로를 넓히기 위해 암벽을 깎아서 뚫는 위대한 공학적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 성문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 통로 중 하나입니다. 육지의 대로와 바다의 길로 인해 다소는 동과 서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다소는 총독의 지배권이었습니다. 크세노폰은 다소를 “위대하고 번영한 도시”라고 했습니다. 주전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다소를 점령하고 헬라적 요소들을 더욱 가미시켰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주전171년 길리기아에 체류했습니다. 그는 동양적 영향보다 헬라적 요소를 고무하기 위해 다소를 헬라 자치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통치초기에 다소에 산업과 상업을 육성시키려고 유대 식민자들을 이주시키고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폼페이가 주전64년에 길리기아 속주(Province)를 재편성하였을 때 다소는 로마 정부의 사령부였습니다. 안토니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모든 다소 주민에게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특권을 더욱 확실히 보장했습니다. 다소에서 화폐가 주조되었습니다. 이웃의 길리기아 성읍들은 이러한 면에서 동과 서의 혼합지역이었습니다.
다소에는 그 밖의 Greco-Roman 도시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스트라보(주전63년)는 다소인들의 교육과 철학에 대한 열정은 아테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길리기아 생도들은 토착민이었지 위의 두 도시의 경우에서처럼 타지에서 온 자들이 아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 아데노도루스(주전74년-주후7년)는 Augustus의 고문이자 교사로서 길리기아 태생이었는데, 그의 지도 아래 다소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정부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주전15년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가 황제와의 오랜 관계를 유지한 명성을 지닌 채 다소로 내려왔을 때 다소의 몇몇 민주적 절차들을 복원하라는 임무가 이 유능한 철학자이자 지도자에게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다소는 많은 시민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발전시켰습니다(행 21:39).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습니다. 개종 후 약 10년간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행9:30/갈1:21). 다소의 복합적인 문화는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교육방침 때문에 바울은 다소의 대학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청년기 바울에게 바리새적 교육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행22:3).
사도바울은 ‘가말리엘’Gamalihvl/Gamalliêl은 그들의 미쉬나(Mishnah)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타니임, 즉 교사들의 대가족 우두머리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한 사람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입니다. “장로 가말리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원로원 의원 힐렐(Hillel)이었다고 합니다. 장로 가말리엘은 Torah에 관한 랍비의 주석서 미쉬나의 많은 구절에 인용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요20:16). 그에 대한 기억은 랍비의 전승에서 가장 큰 찬사와 존경의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말한 그의 정확한 의견은 교계에서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사로잡힌 사도들에 관하여 온건한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주장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말리엘이 자기의 선생이라고 주장할 때에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자기 자신의 경우 가말리엘의 방침이 군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로서 언급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사도는 출신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앞길이 푸르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복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울의 등장(사도행전7:58)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흔히 사울의 뜻은 위대하고 바울은 작은 자라고 해서, 그 근거를 그리스도를 만나기전에는 사울, 만난 후에는 바울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사울(lWav;/Shâ’ûwl/간구된)이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사울의 헬라어음역은 사울로스(Sau'lo")입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바울입니다. Pau'lo"(파울로스)는 라틴어 파울루스(Paulus)에서 유래한 헬라어 음역입니다. 여기에서 ‘작은’이란 말이 유래했지만,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리기아의 다소에서 났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 양친에게서 태어났습니다(빌3:5). 그의 부친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23:6). 로마의 시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출생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행22:28,16:37).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청년기 초에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에게서 유대신학을 철저히 교수 받았습니다(행22:3 ,5:34). 바울사도는 스데반의 순교를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큼 유대신학에 미쳐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게 공격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였습니다. 이후 지칠 줄 모르고 굽힐 줄 모르는, 그리스도의 전파자요 많은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열심과 교리로 그는 스스로 유대인들의 불구대천적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되고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등장은 악인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잔해하려고 날뛰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수리아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까지 잔해하려고 하는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등장은 기독교회사에 거대한 획을 긋게 됩니다. R. E. D. White는 바울사도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가장 심오한 교사, 가장 충실한 친구, 가장 용맹스런 모험과 불굴의 수난자, 가장 눈길을 끄는 성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병사요, 종이요, 그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개종은 급격하고, 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기독교를 히브리사람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종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과 로마인과 환경들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죽는 날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후에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대열에 자신도 함께 하고 평생을 주님과 동행했던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가일층 순조롭게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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