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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진로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사도행전5:1-11)

교회는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인 것 같은데도, 아닌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막을 둘러서 사단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도, 기도하는 시간에도, 찬송하는 시간에도 사단은 우리를 계속 공격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破竹之勢(파죽지세)로 교회가 예루살렘을 강타하고 있을 무렵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4:36-37에서 바나바와 대조되는 일이 이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들은 교회에 재산을 바치고 즉사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누가 교회에 재산을 바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천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교회에 재산을 기부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handicap을 생각하면서 누가는 이 일을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여호수아시대에 가나안정복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40여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성을 정복할 차례였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그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성을 탐지한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온백성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2000-3000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수7:3). 이들의 생각이 잘못되거나 情報判斷(정보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서 얼마 있지 않아 大敗(대패)했습니다. 약36명이 죽고 혼비백산했습니다(수7:4-5). 도대체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여호수아도 몰랐고, 족장들도 몰랐으며,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시나이까?’(수7:7). 이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에서 패한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아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아나니아 부부의 죄’를 같이 묶어서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아간’은 구약의 교회를 진군을 멈추게 한 죄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신약교회의 진군을 멈추게 한 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위해서 재산들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을 부러워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일부만 바치기로 모의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전 재산을 팔아서 바친 것처럼 보이고자 했습니다. 즉 재산을 바치려는 마음이 시기심이었습니다. 충성이 아니라 허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세상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간의 경우와 아나니아와 삼비라의 경우가 大同小異(대동소이)합니다. 이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승장구하고 교회의 전진을 가로막으려는 사단의 계략이 위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들 속에서 사단이 활동했습니까? 교회의 약진을 막는데 이들이 적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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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사도행전4:23-31)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40세 된 남자를 고쳐주고는 예루살렘종교권자들에게 잡혀서(4:2), 그들과 논쟁하던 일, 그리고 조금도 그들에게 밀리지 않았던 일, 또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놓아주었던 일 등을 사도들의 공동체에 와서 모두 보고했습니다. 殺氣騰騰(살기등등)하고 氣勢騰騰(기세등등)하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던 말을 모두 교회공동체에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교회는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모인무리들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왜 그들이 공동체에 복귀해서 기도했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 보다는 셋이 낫고, 셋보다는 열이 나은 공동체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는 미래를 위한 교회로 점점 발전해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갈 준비를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는 박해 때마다 예루살렘공동체(초대교회)에 모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에 모여 같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야고보 순교이후에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할 뻔 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해방되었을 때에 역시 교회에 복귀하여 보고를 합니다.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는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이 끝난 후에 꼭 예루살렘교회에 와서 보고를 합니다.1 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고 베드로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합니까? 그곳에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그곳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구심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이외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어떤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도 아니고 사역자도 아닙니다.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주님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1 나요섭. “예루살렘교회의 초기모습”『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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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교회(사도행전2:37-42)

41절을 보면 그 말을 받는 사람들(베드로의 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 날만 3000명이 더해졌다고 했습니다. 즉 기존의 숫자에 3000명이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열두 명이었습니다(막3:13-14). 그러나 이 외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전도까지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0명입니다(눅10:1).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120명이 모여 기도했습니다(행1:15). 따라서 120명 외에 3000명이 더해진 것입니다. 대략3120명의 성도를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도 정확한 숫자는 아닙니다. 통상 유대인들의 숫자는 남자만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남자도 장년들만(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민1:3)헤아렸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을 합하면 이보다(3120명) 훨씬 많은 숫자였습니다.

흔히 성도들의 수준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박사가 몇, 교수가 몇, 의사가 몇, 법조인이 몇이라고 하면서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던 당시 헬라인들이 많았고, 어제까지 예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 개종하여 성도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공회원부터 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움직였습니다.

오늘날은 전 세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숫자도 모를 만큼의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교회는 지구상에 단 한 개였습니다. 막 태동된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교회가 여러 곳으로 번져나갑니다. 박해로 인해서 번져나가고, 지상명령에 의해서 번져나갑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노도와 같이 바람같이 교회가 번져 나갑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출발은 멋있었습니다. 사도들로부터의 가르침과 성도들 상호간의 사랑과 돌봄의 교제, 떡을 떼는 것, 기도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과 달랐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랍비들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훨씬 권위가 있었습니다. 랍비들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죽은 가르침이었습니다(죽은 교훈). 하지만 사도들의 가르침은 살아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교회를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지구상에 새롭게 등장한 교회는 출발이 좋았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교회는 이제 이것으로부터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교회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교회, 사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된 예루살렘교회는 이후로 지구상의 표본이었습니다. 교회는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말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예루살렘교회처럼, 초대교회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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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봉사(사도행전1:12-26)

25절을 보면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이라 했습니다. to;n tovpon th'" diakoniva" tauvth" kai; ajpostolh'", ajf j diakoniva(톤 토폰 테스 디아코니아스 타우테스 카이 아포스톨레스 아포 디아코니아/그 직무, 그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공직자들이 민원을 상대하면서 민원에게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엄연히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대민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직무를 행하는 것입니다. 봉사라고 한다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직자들은 민원이 제기한 사항을 처리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봉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12절에서 26절을 보면 배반자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로 뽑혔기 때문에 맛디아는 반드시 그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해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봉사라는 것은 집사의 직무입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직무와 봉사들은 반드시 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복음의 확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봉사는 복음의 확장의 일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해야 합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며, 명예가 없어야 하고, 진심과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봉사는 많이 세분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급화되었습니다. 봉사의 일을 해서 빛이 나게 생겼고, 누가 알아주는 직무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힘든 일이나, 그리고 일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빛이 나지 않는 직무들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일군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일군들이 희귀합니다. 사람이 많은 교회에서는 교회의 직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작은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모두 해야 합니다. 사람이 많은 교회에는 찬양대도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찬양대도 구성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미 교회에서 봉사의 직무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봉사는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봉사여야 합니다. 그런데 봉사가 변질되어 갑니다. 봉사의 주체는 복음의 확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봉사의 주체가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서, 사람을 위한 봉사, 즉 자신을 위한 봉사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을 위한 봉사로부터 사람을 위한 봉사로 변해가면서 복음의 확장은 점점 마아너스 확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자신들이 좋은 프로그램을 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성장한 교인들이 그 교회로 유입된 것을 알아도 모른척합니다. 교회마다 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봉사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버렸습니다. 빨리 초대교회의 봉사로 가야 할 텐데. 갈 길이 요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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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정치(사도행전1:1-26)

변증법(dialectic)의 사전적인 정의는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입니다. 변증법의 창시자였던 엘레아학파에서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에 전개되고, 플라톤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卽自對自)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 변증법에 따르면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政治/politics)라는 것은 진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떤 압력에 의해서 한 치를 양보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그랬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23:4). 유대인의 시기로 재판에 넘겨준 줄을 알았습니다(27:18). 그러면 소신대로 바른 판결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바른 판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란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명절을 당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제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께서 죄를 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래도 빌라도는 소신껏 재판을 해야 했습니다. 바라바는 정죄하고 예수님은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생명력에 영향을 끼칠까하여 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후로 빌라도는 신앙 고백할 때마다 등장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교회정치는 어떻습니까? 역시 진리를 진리답게 하지 못합니다. 정반합 사상으로 나갈 확률이 많습니다. 이편도 옳은 것 같고, 반대하는 저 편도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습니다. 중간으로 정하든지 표 대결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진리편이 승리하게 되느냐? 그렇지를 못합니다. 신사참배는 엄연한 우상숭배인데도 변절한 힘 있는 삯군목자들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떠들면서 회유하고 압박한 사례로도 진리가 승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작금의 교회정치행태가 사회에 비쳐질 때 더욱 선교에 훼방거리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옳다고 말하며 물의를 일으키지만, 결국 빌라도의 법정과 조금도 다름없는 상황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정치는 안할 수는 없지만 많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콘스탄틴의 교회정치나 빌라도의 법정이나 양상만 다르지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정치는 아차하면 진리를 그르칠 수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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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보궐선출/맛디아(사도행전1:15-26)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12라는 숫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열두 아들이 후에 열두지파가 되어 구약성경에 신약성경에 깊이 그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3X4=12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숫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2이었다가 빠져나간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꾸고자 했습니다. ,래서 요한이 세례를 줄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항상 같이 했던 두 사람을 천거했습니다. 바사바/유스도와 맛디아였습니다. 그 중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제자의 수에 가입시켰습니다.

이에 대해서 변종길 교수는 사도들이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매튜 헨리도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다른 방법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결정하는데 유익한 해결책이었다고 했습니다. Calvin 역시 이 방법이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F.F. 부르스도 같은 입장입니다. 기도 후에 투표가 진행되었고, 가룟 유다가 죽어서 투표한 것이 아니고 배신했기 때문에 투표한 것이어서 사도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허버트 로키어는 베드로가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자고 제안했을 때 선의와 그 선택과정도 공정하게 실행되었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사바나 맛디아는 더 이상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들 모두 오순절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후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를 보기 위해 왔을 때 이미 주님에 의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다를 대신해 거룩하게 선택된 자는 누구였을까? 솔로몬에 의하면,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맛디아를 선택할 때 다소 사람 사울을 부르심으로써 인간의 도움 없이도 직접 그 빈 사도직을 채우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친히 부르셨을 때와 같이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임명된 사도라고 여러 번 강조할 때, 그는 바로 다락방에서의 열 한 제자에 의한 선발과정과 관계지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펀지에서 자신을 가리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1:1)이라고 한 것이 증거입니다. 바울이 사도직을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입니다. 열 한 사도들이 보궐선거를 하고 있을 그 시간에 사울은 교회에 대한 격렬한 박해자였지만, 오순절 직후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적절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맛디아의 선발에 대해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맛디아도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자신을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최후의 사람)라고 보았습니다(고전15:8,9). 고린도전서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도라는 바울의 주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던것이다(고전1:1)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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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교회(사도행전1:1-3)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앞으로 있을 교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마16:17 18:17). 교회의 모든 일들을 사도들에게 맡기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두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선교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포괄적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를 사도들은 전하는 주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사도들은 부지런히 전했습니다. 스데반이나 야고보는 이 교회를 전하다가 순교하기도 했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교회는 든든히 서갔습니다.

사도행전에 교회라는 용어는 행5:11, 7:38, 8:1, 8:3, 9:31입니다. 8:1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ejkklhsiva/엑클레시아)에 대해 말합니다. 7:38은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에클레시아로 부르고 있습니다. 9:31은 예루살렘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사도행전9:31은 교회가 단수(ejkklhsiva)로 써졌습니다. 그러나 15:41에서는 교회가 복수로(ejkklhsiva") 16:5에서도 복수입니다. 11:22, 12:1, 12:5, 15:4, 15:22에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 행 13:1 행 11:26 행 14:27 행 15:3의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공동체, 18:22의 가이사랴에 있는 공동체, 20:17-18 20:28의 에베소에 있는 공동체는 단수로 표기되었지만, 복수개념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나 공동체에 대한 개념의 특징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은 도시교회와 농촌교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서열을 자꾸 가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서열이나 상호관계의 문제없이 단순히 교회로 불렀습니다. 지역관계는 무시되었습니다. 단수(ejkklhsiva)와 복수(ejkklhsivai)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에클레시아(ejkklhsiva)가 에클레시아이(ejkklhsivai)로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엑클레시아의 총화가 엑클레시아를 만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엑클레시아는 언급된 여러 지역에 존재하며, 이것이 서로 나란히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영향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회중’과 ‘회중들’이든 ‘교회’와 ‘교회들’이 항상 서로 이해하고 도왔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회중이 많은 교회와 적은 교회로 구분되었습니다. 세속적 에클레시아는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력으로 판가름을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집회는 크기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상호보완적이고 상호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를 주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독립적이었고, 공동체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온전히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로 다시 가야 합니다. 잃어버린 순수성과 거룩성, 그리고 충성성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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