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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일제의 박해(사도행전21:7-14)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에서는 전범재판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에게는 공소시효도 없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유럽의 전범재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후에 독일은 이웃국가에게 늘 고개를 숙였습니다. 독일의 총리로 당선되면 이웃나라에 가서 90도로 절하며 우리조상들이 잘못했노라고 빌었습니다. 영국에 가서도 빌고, 프랑스에 가서도 빌고, 스위스에 가서도 90도로 절하며 유럽의 국가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늘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독일은 유럽에서나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쪽에서 군국주의자인 일본은 그 반대였습니다. 전범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주변국들과 영토분쟁 중에 있습니다. 러시아의 쿠릴 열도,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우리나라의 독도를 자기나라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어서 일본은 아시아의 똘아이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태까지 아시아의 전쟁피해국에게 이렇다할 사과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욱일승천기를 은근히 내밀면서 과거로 급 회귀하는 듯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래서 늘 아시아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많은 것들을 소모했습니다. 임진왜란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침략이 잦았던 것과, 급기야 36년간의 치욕적인 역사로 인해서 아직도 그 피해를 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즉 친일파들로 인해서 역사가 엉망이 되었고, 엉망이 된 역사가 바른 역사처럼 행세하게 하려고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모든 것들을 말살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신사참배라는 것은 일본의 과거 천황들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전 국민이 참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우리나라 도시나 읍, 면에 이르기까지 신사를 세우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의 교회는 절대적으로 반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합병직후에는 축절 때마다 천황이란 작자의 사진에 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미 뒈져버린 일제의 천황이란 놈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뒈져버린 무사놈들에게 경건하게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삼엄한 일제하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곧 수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박의흠 전도사, 이영한 목사, 전치규 목사, 손갑종 목사 등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했습니다. 한국의 교회역사도 피 흘린 역사였습니다. 오늘날도 잃어버릴만 하면 일본의 총리라는 작자가 신사참배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일본은 군국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우는 사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선한 사람들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국을 부활시키려는 현재의 정치일선에 있는 자들은 사탄의 자식이요, 마귀의 앞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침몰합니다. 이제라도 일본에게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유럽처럼 전범재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황이란 작자를 비롯해서 모든 군국주의자들을 모두 전범으로 처리하여야 합니다. 태평양에 수장을 시키든지, 남극의 바다에 수장을 시키든지 해야 합니다. 아시아에 이런 똘아이가 있는 한 늘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And

박해에도 불구하고/폴리갑(사도행전21:7-14)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Polycarp/Poluvkarpo"은 사도요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Ignatius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Polycarp은 Ignatius가 로마로 압송되는 107년경에 이미 서머나교회 감독이었습니다. Polycarp과 Ignatius는 매우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Polycarp은 사도요한의 제자로 Irēnaeus와 Tertulliān이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Polycarp은 영지주의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137년에는 이단 Mārkion과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Polycarp은 Mārkion이 소아시아 지방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Mārkion은 137년경에 Hierapolis의 감독 Pāpiās와 Polycarp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둘다 Mārkion을 배척했으며, Polycarp은 Mārkion을 사탄의 장자라 했습니다. Polycarp은 155년경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회의 감독 Anīcētos와 부활절의 시기문제로 논쟁을 벌렸습니다. Polycarp이 로마를 방문한 것은 로마의 교인들 가운데 소아시아 출신의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Polycarp과 Anīcētos 사이의 부활절논쟁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로 아무 결론도 없이 끝냈습니다.

Polycarp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했습니다. Polycarp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Ignatius의 서신들을 모으고 보존하였습니다. Ignatius의 순교는 Polycarp에게 큰 도전과 용기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날이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하고 담담한 Ignatius의 신앙에 도전을 받은 Polycarp은 자신도 언젠가는 순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olycarp은 Marcus Aurelius 때인 165년 경에 순교하였습니다. Polycarp의 순교에 대한 서머나인들의 편지에 의하면 “내가 86년동안 그 분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그분은 결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마지막 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순교를 딩했습니다.

Polycarp의 순교는 유명합니다. Polycarp이 발걸음을 옮기자 총독은 Polycarp인지 물었습니다. Polycarp이 그렇다고 하자 총독은 고소를 거부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총독의 회유의 말입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태도를 바꾸라.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없애 버리라. 이야기하라’고 덧붙이면서 총독은 ‘너의 나이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Polycarp은 운동장에 모인 군중을 쳐다보면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신을 믿지 않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층독은 강요했습니다. ‘맹세하라. 그러면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 Polycarp은 ‘86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는 나를 나쁘게 대한 적이 전혀 없다. 나를 구원해 준 나의 왕을 내가 어떻게 욕할 수 있겠는가?’ 총독은 ‘나는 사나운 맹수들을 가지고 있다. 만일 네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그 맹수에게 던질 것이다’고 했습니다.

Polycarp은 ‘맹수들을 불러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태도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잔인함에서 정의로 바꾸는 것운 훌륭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총독이 ‘네가 맹수들을 얕잡아 보고, 또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라고 했습니다. Polycarp은 ‘당신이 위협하는 그 불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진다.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불이 있다. 즉 장차 임할 정의의 불과 영원한 형벌의 불 그리고 불신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이 그것이다. 왜 당신은 주저하는가? 당신이 원하는대로 행하라’ 그리고 곧 이어 화형에 처했습니다.

And

박해에도 불구하고/요한 후스(사도행전21:7-14)  

역사는 항상 정의와 싸워왔습니다. 역사는 정의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정의는 실제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만일에 정의대로 사람들이 산다면 국가와 사회가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10년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범법을 저지르고도 법무장관을 하며, 대법원장을 하고, 대법관을 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죽고, 불의가 살면 역사는 후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지켜야 합니다.

요한 후스(John Hus/1374-1415)는 체코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왈도파는 프랑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Hus는 1401년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라하의 찰스 대학에서 가르치고, 찰스대학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습니다. Hus는 저술과 설교에서 삶의 개인적 경건과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Hus가 이렇게 한 이유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Hus는 교회내의 권위로서 교황이 아니라 성경을 강조하였습니다. 설교를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습니다. Hus의 주저 교회론(On the Church)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전통적 권위를 옹호하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Hus는 어떤 교황이나 추기경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만들 수 없으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잘못된 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였고 사람들이 彫像(조상)을 예배하고 거짓된 기적을 믿으며 “미신적 순례 여행”을 하는 것을 비평했습니다. Hus는 성찬식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허락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프라그의 대주교는 Hus의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위클리프의 저서도 그는 배격했습니다. 프라그의 대주교는 이들의 책들을 스스로 모아다가 같이 참석한 사제들이 부르는 Te Deum(하나님이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의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자신의 마당에서 책들을 불에 태웠습니다. 미친 개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의 Roman-Catholic은 교회가 아니고 교회를 빙자한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Hus는 프라하에서 오랜 악전고투 가운데 있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Hus를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곧 그의 문제는 로마에 회부되었습니다. 1415년에 후스는 그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에 참석하였습니다. Hus는 황제의 안전 통행증을 가지고 여행하였습니다. 그러나 Hus는 그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불법재판을 받고 화형선고를 받았습니다. Hus가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Hus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방적인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체코인의 민족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체코인은 합스부르크(Hapsburg)家가 1620년 정복하여 Roman-Catholic교회를 회복할 때까지 보헤미아에 Hus파 교회를 세웠습니다. Hus의 개혁은 독일의 지배에 대한 체고인의 저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Hus주의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리다가 보헤미아 형제단, 모리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ren)으로 알려졌습니다. Hus는 순교를 당했지만, 그의 사상과 신앙은 오늘의 바른 교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처: 기독교회사,중세교회사,교회사핸드북

 

And

박해에도 불구하고/위클리프(사도행전21:7-14) 

개혁교회라 했을 때 성도들은 ‘개혁’이란 말을 자꾸 무엇을 고쳐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혁’이란 말은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꾸 고쳐나간다 해서 성경적으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초대교회로 회귀하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고 확장을 했습니다. 문제는 313년의 밀라노칙령입니다. 분명히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여야 했고, 황제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는 당연히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儀式이 말씀보다 앞섰고, 행위가 신앙보다 앞서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꾸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6세기부터 17세기 약 1000년간 교회는 그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개혁하고자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옥스퍼드에 있다가 1361년에 밸리얼 대학(Balliol College)의 학장이 되어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Wycliffe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습니다. 당시 영국도 교황권의 지역이라 교황에게 세금을 바칠 때였습니다. 영국의 왕들과 영국의 지성인들은 영국이 굳이 Roma-catholic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Wycliffe는 1366년 왕이 교황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에드워드 3세의 눈에 띄었습니다. Wycliffe는 교황에게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작은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 Wycliffe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교회의 돈을 모아서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영국이 오랫동안 매년 1000 마르크에 상당한 세금을 바치지 않고 있었으므로 영국에게 매우 못마땅해있었습니다. 이 돈은 죤 왕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매년 로마에 바치기로 약정했던 금액입니다. 이에 교황 우르반 5세가 그동안 밀렸던 세금을 받으려고 하자, 1360년에 에드워드3세는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의회는 세금을 거부했습니다. 1374년에 왕실 성직자로 임명받은 Wycliffe는 왕을 대표하여 교황의 사절들과 만났을 때 왕의 신임을 더욱 얻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과 탁발 수도승들이 위클리프를 미워했습니다. Wycliffe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 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Wycliffe는 우상(또는 형상)과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行列聖歌)과 순례 등을 부정하였습니다. Wycliffe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영국교회의 주교들은 1377년에 런던에서 열린 성 바울교회의 성직자회의에 참석하도록 Wycliffe를 소환하였습니다. Wycliffe는 그 회의에 참석하여 혹독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교황은 바로 Wycliffe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교서를 발표하여 그의 저술에서 19가지 혐의를 걸어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Wycliffe는 화체설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극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왕도 Wycliffe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여러 학장과 동료들마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Wycliffe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1381년에 농민반란(the Peasant’s Revolt)이 일어났습니다. 이것 때문에 Wycliffe는 더욱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Wycliffe는 책임이 없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그 사건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공작 곤트의 죤이 Wycliffe에게 개혁운동을 포기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계속 공표하였습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합하여 숫자로 진리를 왜곡하곤 했습니다.

의회는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교회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지진회의’(Earthquake Council)로 불리었습니다. 회의기간에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Wycliffe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그들을 돕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Wycliffe의 가르침은 정죄를 받았습니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소환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가지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두 사람의 교황이 권좌에 있었습니다. Wycliffe의 추종자들과 동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Wycliffe는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1384년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Wycliffe는 전도단을 조직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의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을 불쌍히 여겨 그는 이러한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달해 주려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붉은 갈색의 길다란 가운을 입고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Wycliffe의 가장 큰 업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서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Roma-catholic은 Vulgate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일반 백성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Wycliffe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몰랐습니다. Latin語를 번역을 해야 했기에 정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할 때였습니다. 가난한 전도자들은 번역 성경의 일부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도시나 촌락에 사는 남녀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Wycliffe는 최초로 성경전체를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로 많이 나옵니다. 영국의 의회와 교회는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화형 시켜야 한다는 법을 1401년에 통과시켰습니다. 1417년에 존 올드캐슬(John Oldcastle)경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직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을 정죄하였습니다. Roma-catholic은 존 위클리프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에 콘스탄스 회의(The Council of Constance/1415)를 열어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1428년에 링컨의 주교는 위클리프의 유해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순교자들의 피에 빚진 자들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해서 최근에 일어한 순교자들의 피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출처: 교회사핸드북,중세교회사,기독교회사

And

아볼로(사도행전18:24-28)

누가는 아볼로의 이력에 대해서 말하기를 알렉산드리아태생이라고 말합니다. 아볼로는 디아스포라유대인입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했습니다. 아볼로는 일찍 주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습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의 회당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했습니다. 그와 같이 했던 형제들이 아볼로를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아가야의 제자들에게 편지를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으로 예수가 오실 메시아라고 가르치며 많은 유대인들을 공중 앞에서 압도를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기 자신과 아볼로를 광범위한 사도 속에 포함시켰습니다(고전4:4-9).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들렸을 때 만납니다. 누가는 아볼로의 탁월한 성경해석 능력을 설명하면서 아볼로가 신앙심이 돈독함은 물론이거니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고난 이후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의 메시야 됨을 증거 하였는지를 기술했습니다(사도행전 18:24-28). 바울은 아볼로의 웅변과 지혜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볼로도 권위 있는 한 사도로서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변호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3:1-8, 22). 아볼로는 당시 그레데에서 전도여행 중이던 디도에게 교법사 세나와 함께 천거되었는데(디도서3:13), 이것이 아볼로에 관해 찾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록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파벌싸움을 심히 책망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경쟁자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역자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밀착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도는 설교자들의 최대 유혹인 시기심을 견디어 냄으로써 우정을 경험하였습니다. 바울은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아볼로의 유창한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두 사람은 에베소와 고린도에서 제각기 전도를 하다가 후에 에베소에서 합류하였습니다.

아볼로에게는 뭔가 참신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물에 비유했을 때, 그 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아볼로에 대하여 영적 성실성의 측면에서 “뜨겁게 끓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열렬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아볼로의 설교를 메마른 정원에 흘러드는 시원한 물줄기에 비유하여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사도행전18:25/고린도전서3:6). 점점 시들해지고 영적으로도 고갈되어 있던 고린도의 개종자들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다시 소생하게 되었을 때, 사도바울은 능력 있는 동역자를 얻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이방 문학과 유대 문학이 교류되는 헬라 문화권의 중심지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만큼 학문이 출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볼로의 구약성경에 대한 정통한 지식과 뛰어난 변론술은 알렉산드리아적인 배경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필로'를 배출하였으며, 70인역본도 번역하여 유대인들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볼로를 볼 때에 아볼로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이 출중하고 성경에 능한 자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 그리고 바울사도와 같이 일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것, 얼마든지 고린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파당에 휘말리지 않은 것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많은 학문이 있으면, 그것을 자꾸 드러내려 합니다. 그리고 교만해지려고 합니다. 목회자만 하면 됐지,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고, 온통 자기주관대로 세상을 휘둘러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세상은 교회를 싫어합니다. 이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전도의 문도 막히고 교회에 이미지가 자연히 실추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교회가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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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설교/그리스도를 예비함(사도행전13:16-22)

왕은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머리요, 한 국가의 최고통치자이기 때문에 왕을 하려고 과거에도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임기가 매우 짧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선호하다보니까 궁중에서 암투가 심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왕자들은 왕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자리는 하나고, 왕을 하기는 해야겠고, 해서 쿠데타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왕의 임기가 짧았습니다. 왕을 한번 하면 죽을 때까지 하는 자리인데 그렇게 주변에서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래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전란과 변란으로 인해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두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사도는 설교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내용을 다윗 왕까지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섭리하셨는가를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많은 나라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하실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이 세상을 치료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에덴에서 파괴된 이 세상을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치료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양육하셨습니다. 250만-300만 명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키우셨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큰 권능(meta; bracivono" uJyhlou'/메타 브라키오노스 휩셀루)으로 빼내셨습니다. 문제는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보내주신다고 해도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야한다고 하면서 스파이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스파이보고를 받고 좌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40년을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내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가나안의 강한 족속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약450년간). 사무엘 선지자때까지 사사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40년간 세우셨다가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며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삼상13:14, 시89:20)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다윗의 선택까지의 요지를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요약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셔서 역사하셨음을 말하고자 회당장이 읽은 성경에 답을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하는 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요, 복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를 전하고자 말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이요, 복음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자요, 사람을 살리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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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주역들(사도행전13:13:15)

사도행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데오빌로, 사도들, 예수그리스도, 갈릴리 사람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 예수의 아우들, 백이십 명의 성도들, 가룟 유다, 요셉(바사바/유스도), 맛디아, 경건한 유대인들(바대인/메대인/엘림인/메소보다미아/유대/가바도기아/ 본도/아시아/브루기아/밤빌리아/애굽/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로마인/그레데인/아라비아인들), 바나바, 헬라파 유대인들, 히브리파 사람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사울(바울), 아나니아(다메섹), 고넬료, 시몬(피장이), 스데반의 박해로 흩어진 자들, 아가보, 마가요한, 로데, 시몬(니게르),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야고보(주의 형제), 유다, 실라,디모데, 루디아, 야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 회당장 소스데네, 아볼로, 에라스도, 부로의 아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두기고, 드로비모, 바울의 생질 등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복움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사도행전1장에서 12장에서는 거의 베드로가 많이 지면을 차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장에서 12장까지는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3,15, 2:14,37,38, 3:1,3,4,6,11,12, 4:8,13,19, 5:3,8,9,1015,29, 8:14,20, 9:32,34,38,39,40,41,43, 10:5,9,13,14,17,18,19,21,23,25,26,32,34,44,45,47,48, 11:2,4,7

13, 12:3,5,6,7,8,9,11,13,14,16,17,18,

그래서 12장까지는 바울의 예수 믿기 전의 상태와 바울의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행전 7:58, 8:1,3, 9:1,3,4,8,11,17,18,19,22,23,24,25,28, 11:25,30, 12:25

그러다가 개종 후에 안디옥에서 사역을 했을 때는 바나바가 바울보다 먼저 거론됩니다.

사도행전 11:25,30, 12:25, 13:1,2,7,

13:9부터는 바울이 먼저 등장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사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복음이 빠른 속도로 이방에 전해졌습니다. 어쩌면 이름도 없이 기록된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복음이 아직도 우리나라까지 오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지 모릅니다. 이들은 복음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들도 있고, 사회와 국가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본받아야 할 일들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살기가 편안해지니까 복음에는 안중에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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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의 충고(사도행전5:33-42)

바리새인인 가말리엘(Gamalihvl)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행전5:34과 22:3에 나오는데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가말리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말리엘은 Mishnah(미쉬나)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교사들의 대가족 우두머리였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가말리엘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으로 “장로 가말리엘”입니다. 그는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랍바/온(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의 율법학자요, 사도바울의 율법스승이며, 바리새파의 양대산맥인 샴마이학파에 대립되는 힐렐학파를 창시했던 힐렐의 손자이자 시므온의 아들로서 당대 최고의 랍비라는 명성과 함께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정통 바리새인이자 위대한 율법학자로서 유대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가말리엘의 죽음으로 인해 율법의 영광도 끝났다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찬사는 유대사회에서 대단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이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때에 가말리엘이 그들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사도들에 대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드다가 일어났을 때 봤지 않느냐? 그를 따르던 400명이 드다가 죽자 흩어졌지 않느냐? 그 후에 갈릴리에서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유혹하다가 망하니까 흩어졌지 않느냐? 고로 너희들은 이 사람들을 상관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저희들의 행하는 일들이 사람들에게서 났으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어보니 옳게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불러들여서 사도들에게 채찍질을 하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두고 보자’는 가말리엘의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현재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들 중의 어떤 목사가 나와서 가말리엘처럼 가만두라고 했을 때, 이단들은 그 사이에 엄청난 일들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말리엘의 가만두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에 살기등등한 패거리들을 잠잠케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적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기드온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절대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디안의 보초들이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이 전쟁이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인 것을 알았습니다(삿7:13-14). 결국 사도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가말리엘의 말로 인해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매를 맞았습니다. 이 매는 40에서 하나 감한 매(39)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만납니다. 그 일들은 악한 상황일수도 있고, 선한 상황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내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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